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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8월 30일 18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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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통령은 취임초기 이처럼 ‘개혁을 통한 국난극복’이 자신의 임기 중 국정운영 기조의 핵심이 될 것임을 국민 앞에 천명했다. 그 해 8·15 경축사에서도 김 대통령은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등 4대 분야의 구조조정을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해낼 것”이라며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내보였다. 그러나 이 같은 ‘초심(初心)’이 거둔 결실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매우 낮다. 동아일보사가 24일 리서치앤리서치(R&R)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개혁정책 추진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반응이 무려 83%에 이른다. 》

중산층 보호와 복지기반 확충에 대해서는 68%가, 교육개혁에 대해서는 67.7%가 ‘잘못 추진하고 있다’고 혹평했다. ‘4대 부문 개혁이 잘되고 있다’는 응답은 23.9%에 불과했다.
| ▼싣는 순서▼ |
‘개혁의 기본방향은 옳은가’라는 질문에 74.8%가 긍정적으로 답할 만큼 개혁의 취지와 기본방향에 대해서는 대다수가 공감하면서도 그 과정과 결실에 대한 평가가 저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원책훼손과 준비부족▼
첫 번째 요인이 일관된 원칙의 결여다. 원칙을 무시하면서 개혁의 명분과 실효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하이닉스반도체나 대우차 쌍용양회 현대투신 등 부실기업 문제가 아직껏 국민경제에 치명적 부담이 되는 것도 기업구조조정에 ‘민간자율’이라는 원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 ▼관련기사▼ |
준비부실로 인한 실천프로그램 부재도 개혁부진의 중요한 원인. ‘왜’ 개혁을 해야하는지는 목청을 높였지만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공감대 확보에 실패했다. 의료개혁은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개혁추진이 가져올 비용과 효과를 적확하게 따져볼 만한 역량이 결여된 채 밀어붙이다가 국민을 엄청나게 불편하게 만들고 불만만 샀다. 일본에서 이미 실패한 경험이 있는데도 준비를 소홀히 한 채 의욕만 앞서 일을 그르친 것. 관료의 실적주의 성과주의가 낳은 실패였다.
개혁주체여야 할 일선 교사들을 개혁대상으로 몰아붙이면서 추진되던 교육개혁은 결국 교육현장과 괴리된 채 겉돌았고 심지어 ‘교육이민’을 양산하는 불행한 사태를 초래하기도 했다. 개혁은 국민의 동의와 참여를 추진에너지로 하는 것이란 점을 망각한 결과였다.
이런 일이 거듭되면서 개혁의 수혜자여야 할 일반 국민이 개혁을 불편해 하는 ‘개혁피로 증후군’에 시달렸다. 이른바 ‘집중과 선택’을 못하고 관료들의 성과주의 실적주의에 매달려 전방위 개혁을 시도하다보니 생긴 부작용이다.
▼포퓰리즘 논란▼
뿐만 아니라 정치적 접근방식의 난조(亂調)도 근본적 요인으로 꼽히는 대목이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현 정부는 각종 개혁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국회 내에서의 토론과 협상에 기대기보다는 원외의 외곽세력을 동원하는 방식을 애용했다”고 지적한다. 개혁추진에 수반될 수밖에 없는 갈등양상을 원내 리더십 확립과 협상능력 제고를 통해 풀려하기보다는 국회 바깥 세력에 기대어 해결하려 했다는 것. 이른바 ‘언론개혁’도 그 전형적인 예다.
이러한 정책추진 스타일 때문에 포퓰리즘 문제가 대두됐고 사회 정의적 복지적 차원에서 필요한 개혁조차 각 분야에 이분법적 대립과 갈등만 증폭시킨 채 포퓰리즘 논란에 휘말려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모든 개혁의 근본이 되어야 할 정치개혁을 기대하는 건 말 그대로 연목구어(緣木求魚)일 뿐이다.
▼개혁을 이루려면▼
하지만 여기서 개혁의 도정(道程)을 멈출 수는 없다. 개혁이 이 시대 역사적 소명이라는데 대한 이론은 별로 없다. 개혁의 기본방향에 대한 압도적 지지가 그 당위성을 말해준다. 한정록 홍익FLT 대표도 “개혁피로증후군이 있다고 해서 개혁을 멈출 수는 없다. 개혁 없이는 우리의 미래도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요란한 구호나 정치적 목적이 숨겨진 비상식적 상황 조성이 아니라 국민의 진정한 공감대 속에 사회 전반에서 고비용 저효율의 낡은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길은 무엇인가. 전문가들은 김 대통령에게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입을 모은다.
“금모으기운동을 벌이던 외환위기 직후처럼 다시 한번 국가의 잠재역량을 한 곳에 결집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겸허하게 초심으로 돌아가 큰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송덕호 왓슨아이어트컨설팅 한국법인 대표), “개혁은 항상 장기과제일 수밖에 없다. ‘일제 단속식’으로 해보다 안되면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끈기 있게 추진해야 한다.”(이원기 모건스탠리 고문), “만약 외환위기 직후라는 최고의 ‘개혁 기회’를 낭비한다면 이는 역사와 국민에게 크게 죄짓는 일이다.”(신인석 KDI 연구위원)
<허승호기자>tiger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