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상봉]"여보 머리는 어찌 이리 희었소"

  • 입력 2000년 12월 1일 00시 07분


남과 북에서 떨어져 살아온 아내와 아들, 어머니에게 상봉의 그 날은 50년 만에야 찾아왔다. 이번 서울 상봉에서는 지난번과 달리 부모―자식의 만남이 4건, ‘촌수 없는’ 부부의 만남이 3건 등에 불과해 이들은 다른 상봉가족들의 반가움 이상의 뜨거움을 전해주었다.

▼부녀상봉▼

이들은 쉽게 말문을 열지 못한 채 연방 흘러내리는 눈물로 길었던 이별 뒤의 첫 만남을 시작했다.

“내가 오래 살다보니 네 얼굴을 보는구나.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

휠체어에 앉아 아들을 맞는 노모의 얼굴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열일곱살 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뒤 생사조차 모르고 살아온 아들이 일흔 노인으로 나타나다니….’ 어머니 박천례씨(91)는 목이 메는 듯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어머니 통일될 때까지 꼭 살아 계셔야 해요.” 아들 홍세완씨는 어머니 품에 안겨 펑펑 울음을 터뜨렸다.

홍씨가 의용군에 끌려간 것은 51년 봄. 중공군이 철수하며 중학교 3학생이던 큰아들을 데려간 것. 박씨는 큰아들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네 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림을 꾸려왔다.

아들을 만나기 전날 “설레는 기분에 잠을 설쳤다”는 박씨는 아들에게 테이블에 놓인 과일을 집어주며 50년의 한을 달랬다.

50년 만에 딸을 만나는 아버지의 마음은 단 1분도 흘려보내기 어려웠다.

“아버지 제가 순호예요.”

반백년 만에 남한의 아버지 권경태씨(90)를 만난 딸 순호씨(67)는 자신이 늦게 들어오자 불편한 몸을 이끌고 상봉장 입구로 향하던 아버지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달려와 아버지 품을 파고들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걸을 수 있는 권씨가 지팡이도 없이 입구로 향한 것은 북에서 오기로 한 딸 순호씨가 뒤늦게 상봉장에 입장했기 때문.

순호씨는 연방 “아버지”만을 외치며 울먹였다. 아버지는 혼잣말로 무언가를 웅얼거리며 ‘이제 다 됐다’는 듯 연신 딸의 등을 어루만졌다.

서울이 고향인 순호씨는 경기여고 2학년이던 51년 서울대에서 주최한 의료봉사활동에 참가했다 소식이 끊겼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납북됐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권씨는 ‘이승의 인연은 끊겼다’며 체념하고 산 지 오래.

한참을 눈물로 범벅이 된 채 흐느끼던 순호씨는 아버지에게 “금강산에도 놀러오시고 제가 사는 곳(평양)도 구경시켜 드릴 테니 꼭 오세요”라고 말하며 손을 꼭 붙잡았다.

▼부부 상봉▼

“그동안 어떻게 살았소? 턱은 알겠는데 다른 곳은 잘 모르겠소. 머리는 어찌 이리 희어졌소?”

50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은 북의 김중현씨(68)는 남녘의 아내 유순이씨(70·서울 양천구 신월7동)를 만나자마자 그동안 쌓아두었던 말을 쉴새없이 쏟아냈다.

유씨는 연방 흘러내리는 눈물만 닦아낼 뿐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 절 받으세요.” 아들 영우씨가 50년 만에 절을 올리자 유씨는 “아버지라고 처음 불러보는 거라우”라며 마음속에 묻어두었던 한을 풀어냈다.

“이제야 만나다니 얼마나 고생이 컸소.”

김씨는 스무살 꽃다웠던 시절의 아내를 만난 듯 다정히 포옹했다.

유씨는 결혼 6개월 만에 의용군으로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며 유복자 아닌 유복자로 태어난 아들과 함께 50년 세월을 한을 삭이며 살았다. 남편 이름이 1차 상봉자 최종 명단에 포함되지 않아 낙심했었지만 이번에 모든 한을 한꺼번에 풀어낸 것.

이 자리에서 아들 영우씨도 생애 단 한번도 불러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며 ‘유복자’ 생애의 한을 삭였다.

<이훈·이동영·조인직기자>dreamlan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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