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호남출신 학자들이 말하는 지역감정 치유]

  • 입력 2000년 5월 1일 20시 03분


《영호남 출신 교수들이 각자 출신지역의 지역주의 투표행태를 비판한 4월 17일자 ‘지역감정 몰표 이대론 안된다’ 특별기고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김성재 대통령정책기획수석의 ‘소수의 단결은 정의, 다수의 단결은 불의’라는 발언으로 지역주의 문제가 새롭게 논란이 되고 있는 시점에서 두 필자를 초청해 한국의 지역주의를 진단하는 대담을 가졌다. 우리 사회를 괴롭히는 지역주의의 연원을 살펴보고 극복을 위한 과제 등을 들어본다. <기획팀>》

▼한인섭▼

△ 59년 경남 진주 출생

△ 부산 동성고 졸업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

△ 서울대 법대 교수

▼윤평중▼

△ 56년 광주 출생

△ 광주일고 졸업

△ 고려대 철학과 졸업

△ 미국 남일리노이대 철학박사

△ 한신대 철학과 교수

한인섭교수〓지역감정에 관해 발언하려면 출신지역부터 밝혀야 할 정도로 지역감정이 악화됐다. 지역감정에 대한 그 동안의 지적은 중립적이거나 양비론적이었고 다른 지역이 문제라고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선거 뒤 양당 원내총무의 설전을 보아도 내 탓이 아니라 네 탓만 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안된다. 지역감정 해결은 자신이 속한 지역에 대한 자기반성, 상대방이 지역감정을 갖게 된 원인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자기에게는 엄격해야 하고 상대에게는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야 진정한 국민통합이 가능하다고 본다.

윤평중교수〓호남이 61년 이후 사회적 약자로 인지돼 왔다는 사실 때문에 강자에 대한 비판은 용이한 반면 약자에 대한 비판은 정서적으로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지식인들로부터 영남 출신을 동원해 영남을 비판하고 호남 출신을 동원해 호남을 비판하는 구도는 결국 양비론이 아니냐는 지적을 들었다. 호남에 바탕을 둔 정당이 집권했지만 30여년 영남 패권주의의 결과 아직도 현격한 불균형 구조가 남아 있는 현실에서 양쪽 모두 문제라고 비판하는 것은 기계적 양비론이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그러나 지난번 기고는 엄존하는 지역주의적 편견과 콤플렉스에 대한 자기반성을 핵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양비론과는 다르다.

한교수〓50년대까지는 영호남 지역감정이 거의 없었다. 61년 이후 경제개발 과정에서 개발이익을 영남과 서울에 편중시켰고 호남은 소외됐다. 지역간 차별이 계층차별로까지 이어진 것이 현실이다. 서울을 보면 강남권에는 영남인구가, 상대적 빈곤지역에는 호남인구가 많다. 취업 승진 등에서도 상당한 차별이 수십년간 있었다. 5·18 민주화운동은 결국 광주 전남 시민들이 전 국민이 저항해야 할 군부정권에 대해 홀로 대항하다 진압된 사건인데도 영남정권이 지역감정의 문제로 전환시킴으로써 지역감정 문제를 악화시켰다. 87년 이후에는 호남의 저항적 피해의식이 한 정당으로 응집됐고, 그 정당은 지역의식을 일부 이용한 측면이 있다. 국민적 민주화 욕구가 진정한 국민통합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지만, 현실 정치권에서 지역주의를 악용해 권력기반을 닦는 바람에 지역균열이 첨예화됐다. 역사적으로는 영남의 잘못이 크지만, 현 시점에서는 두 당 모두 지역정서를 이용하고 있음을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윤교수〓5·16 쿠데타 이후 경부(京釜)축 중심의 산업화와 인재등용 정책 때문에 호남지역의 상대적 박탈감이 지속적으로 악화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편중개발과 인사차별이 지금처럼 뜨겁게 공론화된 적이 없다. 80년대 초 어느 연구소에서 3급 이상 고급공무원의 출신지역을 연구한 것이 유출돼 말썽이 된 적이 있다. 그러나 본격적인 공론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평적 정권교체 후에야 언론 등에서 민감하게 지적하고 따져 묻는 자체가 흥미롭다. DJ 집권 전에는 언론이 인사차별에 관한 보도 및 비판 임무 자체를 방기(放棄)했기 때문이다. 지역감정은 영호남 서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권력집단이 정권창출을 위해 생산 유포 확산시킨 것이다. 지금은 보통사람들이 동원된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동의하고 내면화해서 잠재의식에까지 깊숙이 육화(肉化)됐다는 데 상황의 심각성이 있다.

한교수〓영남인들이 ‘DJ가 경제위기는 해결했지만 영남쪽에 피해를 줬다’는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인사편중의 문제도 꼼꼼히 짚어봐야 한다. 정권이 교체된 뒤 영남인사가 퇴조하고 호남인사가 등장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현상이다. 노태우대통령 퇴임 뒤 TK 중심에서 PK중심으로 넘어갔던 것처럼. 그런데 정권교체기에 경제위기가 절정에 달했고 대량해고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실업의 충격은 그동안 일자리가 많았던 영남지역에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지역경제 악화와 실업의 충격을 DJ 탓이라고 돌리는 지역정서는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호남이 직업적 생존경쟁 과정에서 정권교체의 덕을 본 점도 있다.

윤교수〓현정부도 한나라당과의 공방에서 정정당당하지 못했다. 입맛에 맞게 통계를 윤색해 고위공무원 중 특정지역 출신이 몇 %라는 식으로 따져서는 안된다. 전체 비율은 영남출신이 많겠지만 공무원의 직위는 산술적 계산보다 소위 ‘요직’을 어디서 얼마나 차지했느냐를 따져봐야 한다. 현정권이 야당일 때 주장했던 인사청문회도 도입하지 않은 상태에서 독식이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요직에 호남 출신을 대거 등용한 것은 문제다.

한교수〓지역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정치인은 이득을 보지만 유권자는 의정활동에 충실하고 국리민복을 위해 봉사할 인물 대신 보스 추종, 패거리 조성 집단에 기회를 주게 된다. 바람직한 사회는 중심이 튼튼하고 양극이 적은 볼록렌즈형 사회이다. 그런데 중심은 약하고 양극이 두터운 오목렌즈형 사회로 가야 유리한 세력이 양극화를 조장한다. 영호남간의 지역갈등을 극대화함으로써 몰표를 노리는 이런 오목렌즈형 인간들에게 현혹되는 풍토가 개탄스러운 것이다.

윤교수〓유권자 자신이 특정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몰표를 주는 행태에는 무엇인가 이익을 기대하는 심리가 있는 것 같다. 지역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정치권력을 획득하면 당장 경제적 이득을 기대할 수 있다는 심리도 무시할 수 없다. 부산의 삼성자동차 문제도 재벌이 경제논리보다 지역정서에 기대어 무리하게 추진함으로써 어려움이 생겼다. 이처럼 지역주민들 사이에 우리 지역을 대표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아야 반사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엄존한다. 사례를 부산에서 들었지만 대구 광주도 마찬가지다.

한교수〓국회의원은 입법 국정감시 정책활동의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유권자들이 이 같은 근대적 가치에 무관심한 채 연고주의적 혜택을 주로 기대하고, 지역개발도 전국의 균형발전이 아니라 ‘내 지역만’의 개발을 기대할 때 싹쓸이 투표행태가 나타난다. 이 때문에 전국의 균형발전, 고른 인재 등용 등 근대적 가치가 희생된다. 지역 차원에서는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이란 것이 전체 국가적으로는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윤교수〓지역감정 선동이 발붙이지 못하게 선거와 정당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득표비율은 적지만 전국적으로 고른 득표를 한 정당에 대해서는 비례대표 배분에서 가중치를 주고 특정지역에서 몰표를 받는 지역주의 행태에 의존하는 정당에 대해서는 불이익을 주자는 의견도 제도적 대안이 될 수 있다.

한교수〓총선연대가 여러 기준을 제시하고 낙천 낙선운동을 벌여 효과를 거뒀다. 의정활동이 투명하게 공개될수록 지역감정을 희석시키고 중화시킬 수 있는 다른 기준이 유권자에게 전달돼 투표행태가 변하게 된다. 선거구 획정도 문제다. 지금 한 선거구당 인구가 1 대 4 정도까지 불균형하게 돼 있어 농촌의 경우 대도시보다 심지어 4배까지 투표가치를 갖고 있다. 선진국에서는 1 대 2를 넘으면 위헌이다. 이런 편차를 조정하면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고 지역정당의 토대를 허물어뜨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윤교수〓지역주의적 차별을 사회적 왕따 현상으로도 볼 수 있다. 한국은 타인과 사회적 정치적 약자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빈약한 사회다. 외국인 근로자, 중국 동포, 장애인의 인권 문제도 진정한 개인이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집단적으로 휩쓸리면서 오히려 약자를 차별하고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보다 못살고 초라한 중국동포를 차별하는 현상을 볼 때 통일이 이루어져 약자인 북한 주민과 더불어 살 경우 동서문제보다 훨씬 심각한 남북문제가 생길 수 있다.

한교수〓마이노러티 문제는 사실 심각하다. 그런데 김성재 대통령 정책기획수석의 발언을 계기로 마이노러티 문제가 갑자기 제기됐다. 공정거래법 노동조합법 등에서 강자의 단결을 견제하면서 약자의 단결을 옹호하는 것은 정당하나, 영호남의 문제에 선악의 개념과 마이노러티 문제를 끌어들인 것은 잘못이다. 호남에선 한나라당이 마이노러티다. 마이노러티 문제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개개인의 인권 문제로 접근돼야 할 것이다. 지역차별에 대한 의식을 정치권의 패권전략의 하나로 악용해서는 안된다.

윤교수〓지역주의 문제는 복합적이고 모순적이어서 다양한 관점과 포괄적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김성재 수석 식의 ‘단순 명쾌하기 짝이 없는’ 진단은 사태를 푸는 데 도움이 안된다. 호남이 집권하기 전까지 약자로서 일방적으로 당해온 것 같지만 뒤집어 보면 호남을 텃밭으로 한 정치세력과 영남 텃밭의 정치세력이 적대적 의존관계를 맺어왔다고 볼 수도 있다. 남북한의 정치세력도 이러한 적대적 의존관계를 이용해 서민들의 삶의 질과 민주화 요구를 희생시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남 몇 개 지역에서 이번에 노동자들이 지역주의 정서를 떨쳐버리고 정강 정책을 보고 투표한 것은 민주화를 앞당기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교수〓2000년 대희년을 맞아 교황이 가톨릭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십자군전쟁, 마녀사냥, 인디언 대학살 등의 죄악을 ‘기억의 정화’ 차원에서 참회했다. 이 같은 참회는 다른 종교, 다른 인종에 마음의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도록 한다.

한국 사회도 이제는 남 탓을 하기 이전에 진정어린 참회를 모아 도덕성을 갖춘 성숙한 국민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동서간 화해의 실현은 남북간 화해를 위한 준비작업이 될 것이다.

윤교수〓호남이 한국사회의 약자로 핍박받고 5·18 민주화운동에서 희생당한 것은 특정정당이나 정치세력을 온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따라서 호남인은 전향적 자세로 관용하고 냉철하게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부여당과 야당도 지역감정 문제를 다루는 데 공정성과 투명성을 갖춰야 하며 정략적 접근을 해서는 곤란하다.

<정리〓이인철기자>inchul@donga.com

■4월18일자 기고 독자반응

한인섭교수와 윤평중교수는 특별기고가 동아일보에 실린 뒤 전국의 독자들로부터 다양한 반응을 받았다. 두 교수는 “지역주의 문제가 한국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임을 새삼 확인했다”며 “전화를 거는 독자들이 거주지별로 시각의 편차가 커 착잡했다”고 말했다. 다른 언론의 반응도 커 중앙일보 한겨레신문 부산일보 미디어오늘 진주MBC방송 등이 두 교수의 특별기고와 관련한 반응을 다루었다.

한인섭 교수는 특별기고가 나간 뒤 고향 사람들을 비롯해 많은 독자들로부터 격려와 고백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부산지역의 한 독자는 노무현의원의 낙선을 거론하며 “지역 실정은 서울의 책상머리에서 사고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전남 구례의 한 노인은편지를 보내 ‘한 교수의 글을 읽고 신문이 손에서 놓여지지 않더라’며 ‘당신이 서울이 아닌 영남에 거주했더라면 이번 선거에서 어느 당에 투표했겠느냐’고 물었다. 호남 독자들 중에는 ‘인사편중 면에서 잘못이 드러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지역은 몰라도 영남지역은 이 점에 대해 할말이 없다’는 지적에 크게 공감하는 분위기였다고 전했다.

윤평중교수는 신문에 이 기사가 나온 날 하루 내내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다. 수도권 독자들로부터는 주로 격려성 전화를 많이 받았다. 영남권 독자들 중에는 “시원하게 잘 썼다”면서 “술이라도 한잔 같이 하고 싶다”는 독자들이 많았다. 반면 호남지역 독자들로부터는 ‘글 전체 취지는 이해하지만 현지 주민들의 정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식의 항의를 더러 받았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도청 앞 현장에 있었다는 한 호남인은 ‘호남의 한나라당 지지율이 3%밖에 안된다’고 지적한 부분에 대해 “한나라당의 뿌리를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떻게 그 당을 찍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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