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신문]『환란 내잘못 아니다』책임 떠넘기기

  • 입력 1999년 1월 25일 19시 30분


첫 증인신문이 이뤄진 25일 경제청문회에서는 97년 당시 한국은행의 외환위기 인지시점 및 안일한 대응, 실패로 끝난 한국은행의 환율방어, 임창열(林昌烈)전경제부총리의 IMF행 발표지연 여부 등이 쟁점이었다.

그러나 이경식(李經植)전한은총재는 외환당국의 한 축으로서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환율정책의 착오는 인정하지 않았다. 임전부총리는 “임명장을 받은 11월19일에 IMF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고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한국은행의 안일한 대응〓국민회의 정세균(丁世均)의원 등은 “97년 초부터 은행의 외채 만기연장률이 떨어지는 등 상황이 악화되기 시작했다”면서 “한은이 심각성을 제때 인식하지 못하고 안일하게 대처해 환란을 자초했다”고 따졌다.

이전총재는 “한보사태가 터진 97년1월 약간의 위기를 느꼈고 7월 기아사태와 10월20일 이후 대만 환율절하와 홍콩의 주가폭락, 그리고 S&P(미국신용평가기관)가 우리 신용을 급격하게 평가절하하면서 더 강한 강도로 위기를 느꼈다”고 말했다.

의원들은 “97년3월26일 한은 내부보고서에서 외환위기의 도래를 경고하지 않았느냐”면서 안일한 대응을 나무랐다. 이전총재는 “여러가지 정책대응이 나열돼 있었으며 이런 정책을 제대로 안쓰면 위기가 올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했다”고 보고서의 의미를 축소했다.

▽환율정책〓국민회의 추미애(秋美愛)의원 등은 “환율 고평가정책이 외환위기 첫번째 원인이 됐다”며 한은의 부실한 환율정책을 추궁했다.

그러나 이전총재는 “외환보유고를 소진한 것은 잘못이지만 환율정책이 잘못됐다고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장재식(張在植)위원장이 중간에 끼어들어 “내가 96년10월 국정감사 때부터 엄청난 경상수지 적자 때문에 94년 멕시코위기와 같은 사태가 올 수 있다고 환율조정을 여러차례 촉구했으나 이전총재가 묵살했다”고 가세했다. 이전총재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서 환율을 조정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며 계속 고자세였다.

▽강경식전부총리의 태도〓국민회의 천정배(千正培)의원 등은 “11월9일 강전부총리 주재 대책회의에서 윤진식청와대비서관이 IMF행을 거론하자 강전부총리가 불쾌히 여기면서 거절했으며 내 임기중에는 창피해서 IMF로 갈 수 없다고 했다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전총재는 “회의를 하다 보면 언성이 높아지기도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기억나지 않는다”며 즉답을 피했다.

자민련 이건개(李健介)의원 등은 “강전부총리가 10월28일 등 세차례에 걸쳐 외환시장 개입중단을 한은에 지시하고 번복하는 과정에서 이전총재는 꼭두각시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이전총재는 “외환관리의 주무부서는 재경원”이라며 “당시 시장압력이 거센 반면 밴드(환율변동폭)가 너무 작아 후퇴하면서 방어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며 재경원의 개입을 시인하지 않았다.

▽임전부총리의 IMF행 인지시점〓자민련 의원들은 “임전부총리가 11월19일 오전 임명장을 받은 뒤 오후4시반 경제장관 간담회에서 IMF행에 관한 얘기가 나오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이에 임전부총리는 “그 회의는 금융안정대책에 대한 설명을 위한 자리였으며 그날 저녁 신임 김영섭청와대경제수석과의 간담회에서 김수석이 ‘IMF로 가야되지 않느냐’고 얘기해 짐작했다”고 말했다.

〈이원재기자〉wj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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