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金大中). 그는 언제나 소수(少數)에 속했다. 정치적으로는 야당, 지역적으로는 호남, 학력으로는 상고출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입문 후 40여년을 줄곧 주변부에서 지내왔다. 그래서 그는 늘 권력과 기득권층의 견제와 감시, 탄압과 회유의 대상이었다. 그의 정치역정 또한 명(명)과 암(암), 극과 극,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가시밭길이었다.》
97년 12월18일 마침내 그는 네번째 도전 끝에 평생 꿈꿔온 중심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집권은 한 개인에서 개인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의미 이상이다. 대한민국이 수립된 지 근 50년만에 처음으로 소수와 다수의 위치가, 권력 주변부와 중심부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사회 경제적 의미가 더 클 수도 있다.
김당선자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현실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열렬한 추종자들은 그를 「선생님」으로, 그의 정적(政敵)들은 그를 「거짓말쟁이」로 양극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현실주의자로서의 정치노선을 이탈하지 않았다.
참새들에게 모이를 주고, 정원의 꽃을 벗 삼는 일면과 함께 전진과 후퇴의 시기를 알고 정치적 실리를 꼼꼼히 셈하는 치밀한 면모도 지녔다. 그가 일찌감치 주창해온 3단계 통일론, 남북 동시 유엔가입론 등 통일해법에서부터 중소기업위주의 경제이론,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과도 같다」는 수사(修辭)에는 현실과 이상을 구분하고 반보 앞서 세상을 내다보는 그의 현실주의 철학이 배어 있다. 그가 이번 대선을 앞두고 「중도보수주의」의 색채를 강화하며 보수층의 반감을 약화시키려 한 것도 그의 현실주의 노선때문으로 평가하는 이가 많다.
김당선자는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가 현실과의 안주나 타협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그에게서는 현실의 난관을 뚫고 줄기차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는 저돌적인 면모도 엿볼 수 있다. 다섯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온 것도, 70대 노정객으로 「3전(顚)4기(起)」의 신화를 일궈낸 것도 바로 그의 끊임없는 「응전정신」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측근들의 평가다.
김당선자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김당선자는 호적상으로 25년생, 실제로는 24년 1월6일생(음력 23년12월3일)이다. 여덟살 때부터 신문의 정치면을 꼼꼼히 읽을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하의도 섬소년이 북악의 주인이 되기까지 7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양복상의에 붉은색 행커치프를 꽂고, 백구두를 신고 종로거리를 누볐던 야심에 찬30대 초반의 정치지망생이 권부(權府)최고자리에 오르기까지는 40여년이 걸렸다.
김당선자는 하의도에서 농사꾼인 아버지 김운식(金雲植)씨와 어머니 장수금(張守錦)씨 슬하의 4남2녀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당선자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남다른 교육열을 가졌던 어머니는 전답까지 팔아 아들을 목포로 유학시켰다. 그는 일제하였던 39년 5년제 목포공립상업학교(현 목포상고)에 수석으로 합격, 모친의 기대에 부응했다.
43년말 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제징집을 피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해방후 회사관리인이 된 그는 사업수완을 발휘, 목포일보를 경영하는 등 청년사업가로 성장했다. 그가 말하는 「사업가 경력」도 이때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그는 해방공간에서 한때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참여했다가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탈퇴했다. 그러나 그의 건준경력은 이후 「정치인 김대중」이 「색깔론」에 시달리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한국전쟁중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으나 총살직전에 탈옥, 첫번째 사선(死線)을 넘었다. 전후(戰後) 사업성공으로 여유를 찾은 그는 어렸을 적부터 막연히 동경해오던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치입문과정은 멀고도 험했다. 54년 목포 민의원 선거, 59년 강원 인제 보궐선거, 60년 5대 민의원선거에서 잇달아 고배를 마셨다. 61년 5월13일 실시된 인제 보궐선거에서 천신만고 끝에 당선됐으나 사흘 후에 터진 5.16군사쿠데타로 의원선서조차 못한 채 또다시 방황해야 했다.
당시 쿠데타의 주역중 한 사람이 육사8기 출신의 청년장교 김종필(金鍾泌·JP)씨였다. 이번 선거에서 김종필씨는 「DJP연대」를 기반으로 「김대중대통령」을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됐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악연(惡緣)으로 시작됐다.
세 번의 낙선은 김당선자에게 엄청난 시련을 몰고왔다. 재산은 바닥났고 59년에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첫부인 차용애(車蓉愛)씨와 사별했다. 부인 차씨의 죽음은 김당선자에게 큰 충격을 줬다. 목포 유지의 딸로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란 부인이 자신을 만나 고생만 하다 죽었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62년 김당선자는 당시 YWCA총무로 일하던 신세대여성 이희호(李姬鎬)여사와 재혼한다. 세 살 연상의 이여사는 충남 갑부의 딸로 미국에서 유학한 인텔리였다. 이여사는 집안의 숱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 둘이 딸린 김당선자와 결혼했다.
그즈음 그에게도 행운이 찾아왔다. 장면(張勉)박사와의 만남을 계기로 민주당 신파에 참여한 김당선자는 63년 6대 총선에서 목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된다. 이후 탁월한 논리와 식견, 달변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중견 정치인으로 발돋움한다. 특히 차관도입, 세제특혜, 경제개발계획의 문제점 등을 날카롭게 추궁, 야당 경제통으로 명성을 날렸다.
64년 김준연(金俊淵)의원의 구속동의안 처리 때는 무려 5시간19분동안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필리버스터(의사진행지연작전)를 해냈다. 그의 발언은 현재도 원내 최장시간 발언으로 한국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68년5월은 평생의 라이벌이자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던 김영삼(金泳三·YS)의원과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 시점이다. 그는 그해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 출마, 김영삼씨와 첫번째 대결을 벌였으나 패했다.
이어 70년 대선후보 지명경선에서 두번째 대결이 이뤄졌다. 당시 「40대 기수론」의 깃발을 올린 김영삼 이철승(李哲承)씨와 맞붙어 그는 1차 투표에서 3백82표를 얻는데 그쳐 김영삼후보에게 뒤졌다. 그러나 2차 투표에서 이철승씨의 도움을 받아 4백58대 4백21표로 YS를 누르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은 이때부터 싹트기 시작했다.
김당선자는 71년 제1야당 신민당 대선후보로 출마, 공화당 박정희(朴正熙)후보에게 95만표차로 석패했다. 당시 그는 『전투에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졌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선전, 박정희씨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것이 그가 박정희씨의 집중견제를 받게 되는 도화선이었다.
박정권은 이후 김당선자를 최대 정적으로 삼고 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한다. 73년 일본 도쿄에서 백주에 발생한 「김대중납치사건」을 비롯해 그는 투옥과 망명, 가택연금을 되풀이했다. 또 71년말에는 승용차가 의문의 대형트럭에 받혀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겼으나 다리를 다쳐 이후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유신치하인 74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구국선언」을 주도했다가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대통령이 피살된 뒤 복권, 잠시 「서울의 봄」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5.17군사쿠데타를 주도한 전두환(全斗煥)장군이 이끈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죄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언도를 받았다.
그는 국제여론과 미국의 압력에 힘입어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형으로 감형돼 죽음의 그림자에서 또 한번 벗어났다. 82년 미국으로 망명한 김당선자는 국내에 있던 김영삼씨와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民推協)를 결성하고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전격 귀국, 신민당 승리의 견인차가 됐다. 군사정권의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이때부터 야권은 또다시 분열을 거듭한다.
87년 김영삼씨와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그는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평민당을 급조하고 만다. 야권의 분열은 두 사람 모두에게 처참한 패배를 안겼다. 이를 두고 김당선자는 후일 「씻을 수 없는 천추의 한」으로 표현했지만 당시 단일화 실패에 대한 절반의 책임은 분명 김당선자에게 있었다.
88년 4.26총선에서 제1야당 총재로 재기에 성공한 김당선자는 잠시 여소야대 정국을 주도했으나 90년 기습적인 3당합당으로 또다시 궁지에 몰린다. 하지만 김당선자는 91년9월 이기택(李基澤)씨가 주도한 「꼬마 민주당」과 통합, 92년 3.24총선에서 의석 97석의 거대야당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92년 14대 대선에 세번째 도전한 그는 김영삼후보에게 또다시 패배한 뒤 정계를 은퇴한다. 그는 잠시 영국에 머물다 93년 귀국,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했다. 그러나 95년 지방 선거 승리를 계기로 그는 정계에 전격 복귀, 국민회의를 창당함으로써 또 한번 「위약(違約)시비」에 휘말린다. 또 야권분열의 역풍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96년 4.11총선에서 자신의 오랜 지지기반이었던 서울에서 패배, 79석만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이때부터 「DJ 대통령 불가론」에 시달려야 했던 김당선자는 내각제 개헌을 고리로 박태준(朴泰俊)씨까지 포함시킨 「DJT연대」를 성사시켜 15대 대선에서 야권단일후보로 출마한 끝에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됐다.
우리 정치권에서 김당선자만큼 파란과 비운(非運)의 정치역정을 걸어온 인물도 드물다. 또 김당선자만큼 극과 극을 달리는 평가를 받는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는 그 자신의 업보이기도 하고 일부는 그의 말대로 군사독재정권이 그에게 씌운 올가미일 수도 있다.
그의 정치역정은 영욕과 부침, 환희와 좌절, 은퇴와 재기가 교차한 한편의 드라마와도 같다. 특히 유신의 장막이 드리워진 72년부터 「민주화시대」가 시작된 87년까지 그는 6년 감옥살이, 10년 연금 및 망명생활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그는 꺼질 듯하면서 다시 살아오르는 촛불처럼, 짓밟혀도다시 일어서는 들풀처럼 질긴 생명력을 유지해 온 「인동초(忍冬草)」였다.
이제 그는 자신이 40여년을 몸담아온 「소수」를 감싸안아야 할 때가 왔다. 그것만이 그가 그토록 비난해온 지역감정을 극복하고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를 건져내는 지름길일 것이다.
〈윤영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