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 신한국당 총재가 드디어 비장의 카드를 내놓았다.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김영삼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할 수 있는 고육책이며 승부수이다. 경선을 통하여 신한국당의 대통령후보로 선출되면서 최고에 달했던 이총재에 대한 지지율이 아들의 군경력문제로 급락하기 시작한 이후 그의 정치적 입지는 빠른 속도로 좁아져 왔다. 경선 후의 당내 분위기 조기 수습 실패,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사면문제로 인한 청와대와의 불협화음 노출 등은 이총재의 정치력 부재에 대한 당내외의 성토와 비판을 야기했다.
그 결과 이총재의 지지율은 대통령 후보 중 3위에 머무르면서 오를줄을 모르고 있고 당내 일각으로부터는 후보사퇴론마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그는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의 비자금 문제를 제기하면서 폭로정국을 조성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비자금 문제는 폭발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이총재의 절박한 상황을 부각시키는 결과만 낳았다. 그리고 급기야는 「권력의 시녀」라고 불리던 검찰마저도 집권여당의 요구와 공식적인 고발조치에도 불구하고 비자금 수사를 대통령 선거 이후로 유보한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 예정된 「YS와의 결별」 ▼
명색이 집권여당 후보로서 일이 이쯤되고 보면 이총재가 청와대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홀로서기를 선언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예정되었던 수순이기도 하다. 이총재는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 문제 때문에 섣불리 정치자금 문제를 제기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주무기인 3김시대의 청산과 깨끗한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지 못해 왔다. 김대중총재의 비자금문제를 제기하면서도 김대통령의 92년 대선자금문제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한 것도 그의 후견인과의 완전한 단절은 피해보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검찰이 비자금 수사를 거부함에 따라 청와대가 결코 과거의 정치자금문제를 대선에 활용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의중을 비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총재는 김대통령과의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 관전하는 국민의 마음 ▼
그리고 이것은 현대 한국정치의 반복되는 유형이기도 하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늘 전임자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전임자의 약점을 딛고 올라서 왔다. 그리고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도 동시에 전임자를 철저히 비판하고 단죄함으로써 자신만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여 왔다. 노태우대통령은 전두환대통령 일가친척의 비리를 부각시킴으로써, 그리고 김대통령은 노대통령의 비자금 수사를 통하여 전임자와의 차별성을 강조함은 물론 당내의 전임자에 충성하는 잔류세력을 척결하고 당권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것은 권력의 속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정치가 아직도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의 정치인들 대부분이 과거의 왜곡된 정치관행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도 개혁에는 성역이 있을 수밖에 없고 과거청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권력기반에 약점이 있고 후임자는 이 약점을 딛고 올라서는 것이다. 이총재도 이러한 수순을 밟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총재의 절박한 상황의 반영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대권정치의 난맥상, 한국정치의 퇴락한 모습이 아직도 과거의 정치악습을 통하여 권력을 잡은 사람들끼리 벌이고 있는 이전투구라는 사실은 관전하고 있는 모든 국민의 마음을 허전하게 하고 있다.
함재봉<연세대교수 정치외교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