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앞에서 한일 대학생 모임인 ‘한일성신학생통신사’ 소속 학생들과 서장은 히로시마 총영사(왼쪽)가 한국에서 가져온 잣나무 한 그루를 심고 있다. 오른쪽은 2009년부터 성신학생통신사 행사를 이끌어온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출신의 오다가와 고 와세다대 일한미래구축포럼 대표다. 히로시마=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8·15는 한국에서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뜻한다. 일본에선 종전기념일보다 더 강렬한 역사적 영점(零點)을 상징하는 숫자로 각인돼 있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히로시마(廣島) 상공 600m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한 시간을 뜻하기 때문이다.
히로시마에선 1947년 이후 매년 8월 6일 8시 15분 세계만방에 평화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세계평화식전이 열린다. 원폭 폭심지로 철골 잔해만 남아 199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원폭돔 건너편에 위치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다.
그 공원 안에는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히로시마 인구 35만 명 중 원폭 피해로 1945년 말까지 숨진 사람만 14만 명. 그중 한국인의 수도 2만 명까지 추정된다는 것을 아는 한국인은 드물다. 식민지 조선에서 징용으로 끌려온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한국인에게도 끔찍한 화인을 찍은 사건이었다.
바로 그 히로시마에서 한일 화해와 협력을 모색하는 단체가 있다. 한국의 고려대와 일본의 와세다대가 주축이 돼 2009년부터 대학생교류협력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한일성신학생통신사’이다. 성신(誠信)은 성의와 신뢰의 약자로 진심을 다해 믿음을 쌓자는 의미다.
올해로 7회를 맞은 성신학생통신사에는 고려대 10명, 와세다대 6명, 히로시마경제대 3명 등 총 19명의 학생이 참여했다. 화정평화재단의 후원을 받은 이들은 5일 오전 9시 반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 앞에서 서장은 히로시마 총영사와 함께 한국에서 공수된 오엽송(잣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잣나무에는 특별한 의미가 담겼다. 잣나무의 학명 ‘피누스 코라이엔시스’는 한국이 원산지인 소나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산림과 직원으로 파견된 뒤 지극한 마음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된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는 한국의 민둥산 녹화사업을 위해 이 잣나무의 양묘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하는 양묘법을 개발했다. 그 공로로 현재 한국 인공림의 37%를 잣나무가 차지하게 됐다.
학생통신사의 한일 학생들은 그 아사카와의 마음을 이어받아 한일 우정을 이어가자는 취지로 2011년 8월 잣나무를 식수했다. 하지만 지난해 4월 그 나무가 뿌리째 뽑혀 사라졌다. 최근 일본에 일고 있는 혐한(嫌韓) 분위기에 편승한 소행으로 추정될 뿐이다.
학생통신사는 그에 굴하지 않기 위해 올해 다시 같은 곳에 잣나무를 식수한 것이다. 4년 전 고려대 학생으로 식수행사에 참여했던 문주영 씨(와세다대 박사과정·31)는 “악화되는 한일 관계 희망의 씨앗을 심자는 마음이 훼손된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이에 굴하지 않고 더 크고 튼튼한 나무를 함께 심을 수 있어 든든하다”고 말했다.
2012년 와세다대 학생으로 학생통신사에 참여한 뒤 한국을 좋아하게 돼 현재 한국외국어대 교환학생으로 재학 중인 이와가키 리카(巖垣梨花·23) 씨는 “히로시마를 피해의 공간으로만 기억했는데 여기에도 한국에 대한 가해의 역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올해 처음 참여한 전채환 씨(고려대 4학년·23)는 “일본을 가해자로서만 떠올렸는데 원폭 피해의 참상 앞에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면서 “한국과 일본의 우정이 논리나 이성보다 이런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는 데서부터 시작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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