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역사강의 달달 외워… 시각장애인에 여행 즐거움 줘야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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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하연근씨 관광해설사 수료 “40번째 직업, 2015년 경복궁서 시작”

“책을 볼 수 없어 녹음한 역사 강의를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듣고 또 들었어요.”

시각장애 2급인 하연근 씨(43·사진)는 지난 6개월을 숫자와 씨름하며 보냈다. 조선왕조 개국부터 근현대사까지의 주요 사건과 왕들의 연대기를 달달 외우고 또 외웠다. 반년간의 노력 끝에 그는 이달 14일 한국관광공사와 서울 종로구가 운영하는 장애인 전담 문화관광해설사 교육과정 수료증을 품에 안았다. 하 씨는 내년 1월부터 경복궁과 창경궁, 북촌 등지에서 장애인 담당 관광해설사로 활동할 예정이다.

그가 앓고 있는 망막색소변성증은 빛을 받아들이는 눈의 광수용체에 문제가 생겨 나타나는 병이다. 환자는 실명에 이를 때까지 조금씩 시각을 잃어간다. 하 씨에게 역사공부는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터널 앞에서 바깥을 바라보는 것 같다’는 그의 현재 시력은 돋보기를 써야 5cm 앞에 있는 글자를 식별할 수 있는 정도다.

관광해설사는 그의 40번째 직업이다. 하 씨는 선천적으로 망막색소변성증이 있었지만, 비교적 시력이 좋았던 20대 초반에는 공업고등학교 전자과를 졸업한 경력을 살려 기계관리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20대 후반부터는 시력이 급격히 떨어져 제약회사 창고관리와 설문조사 등 여러 일자리에서 해고당하기를 반복했다. 더 이상 취업이 힘들어진 37세에는 극단적인 선택도 했다. 하 씨는 “목에 감았던 줄이 끊어져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며 당시를 담담히 회상했다.

이후 별다른 직업 없이 지내오던 그는 올해 초 지인의 소개로 우연히 경복궁을 찾았다. 그러다 경복궁 이곳저곳을 직접 만져보고 체험하는 장애인 투어를 진행하는 시각장애인 관광해설사의 활약상에 큰 감명을 받았다. 하 씨는 얼마 후인 5월 장애인 전담 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지원했다.

그는 “조선시대에는 악공이나 점복사 등의 다양한 일자리를 시각장애인에게 주는 등 예상외로 국가의 배려가 많았다는 점이 흥미로웠다”며 “공부가 힘들어 포기할까 생각도 했지만, 몸의 장애로 마음까지 움츠러들어 조용히 살아가고 있는 다른 시각장애인들에게 여행의 즐거움을 꼭 알려주고 싶어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하연근#경복궁#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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