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 나의 길/송월주 회고록] ② 80년 광주와 함께한 불교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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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토끼의 뿔과 거북의 털을 구하러 다녔소

1970년대 30대 중반의 송월주 스님. 1980년 4월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한 스님은 5·18 민주화운동이 터지자 6월 중앙 종단 대표로는 최초로 광주로 향한다. 송월주스님제공
1970년대 30대 중반의 송월주 스님. 1980년 4월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한 스님은 5·18 민주화운동이 터지자 6월 중앙 종단 대표로는 최초로 광주로 향한다. 송월주스님제공
“스님은 불교계의 전두환 장군 같은 영웅입니다.”

1980년 4월 총무원장에 당선된 뒤 인사하러 온 문화공보부 고위관리가 제 딴에 치켜세워 준다며 내뱉은 말이다. 그러나 나의 종단 대표 등록은 내부 소송 등을 이유로 계속 반려됐다. 여러 곳에 공을 들였지만 허사였다. ‘송월주는 반골(反骨)이다. 그래서 위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는 평가만 확인했다.

악연(惡緣)도 인연이다. 오히려 좋은 인연보다 모질고 질겨 끊기도, 잊기도 힘들다. 문공부 관리에 이어 종단을 출입하던 보안사 직원이 찾아왔다. 그는 ‘총무원장 송월주’ 이름으로 ‘구국 영웅 전두환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합니다’라는 성명을 내라고 부탁했다. 각계에서 이런 지지성명이 쏟아질 때였다. 그것이 시류였고 시대를 살아가는 처세였다. 노골적으로 싫다고 할 수 없어 “정교(政敎) 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며 거절했다. 그랬더니 다시 찾아와 내 이름을 뺀 총무원 명의는 어떠냐고 했고, 다시 1999년 총무원장이 된 사회부장 정대 스님을 통해 또 요구해왔다. 그래도 자주 개혁을 표방하는 제17대 총무원의 이름을 팔 수는 없었다.

돌이켜 보면 조계사의 번지수를 딴 ‘45계획’과 이를 실행한 법난의 그림자는 5·18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짙어졌다. 총무원장 취임 20여 일 만에 광주가 일어났다. 계엄의 재갈이 물린 언론은 불순세력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보도를 앵무새처럼 읊었다.

광주에 가기로 결심했다. 종단 직할의 본, 말사 주지와 신행단체 등에서 100여 명이 참여해 성금을 모았다. 5월 24일 선발대 격으로 ‘소요사태 진상조사 선무단’을 보냈다.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조계사를 관할하던 종로경찰서장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위에서 못 가시게 하라고 했습니다. 안 가는 게 좋습니다.”

나의 입장은 달라질 게 없었다.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 그냥 두고 볼 수 없다. 시민 쪽 희생자와 군인 등 모두를 위로하기 위해서 가겠다.”

6월 3일 교무부장 스님을 포함해 6명이 서울에서 전남 장성까지 기차로 내려간 뒤 다시 차량으로 광주로 갔다. 중앙 종단 책임자로는 첫 방문이었다. 건물에는 총알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고 화약 냄새가 확 풍겼다. 오전 11시 광주 관음사에서 ‘광주사태 희생자 영가(靈駕)’라는 위패를 모시고 법회를 거행하고, 부상자들이 있던 전남대병원과 군 병원을 찾았다. 49재 때 다시 광주를 찾을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양쪽 유족이 함께 참석하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는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의 조언도 있고 해서 포기했다.

당시 실력자로 부상한 이철희, 장영자 씨 부부와의 ‘용두관음’에 얽힌 사연도 있다. 나를 전두환 장군에 비유한 그 관리가 9월경 방문했다.

“장영자 씨가 모시고 있는 용두관음 불상이 있는데, 그 불상을 모시고 여의도광장에서 스님 수천 명과 신도 100만 명이 모이는 호국기도회를 했으면 합니다. 이철희 씨가 대회위원장을 맡고, 경비 5억 원은 그쪽에서 부담합니다. 아마 대표 등록 문제도 풀릴 겁니다.”

말이 호국기도회지 전두환 장군을 위한 이, 장 부부의 충성극이 뻔했다. 그래서 “이철희는 신도회장도 아니고, 대회를 한다면 최재구 신도회장이나 내가 해야 한다”며 거절했다.

법난 직전 총무원을 찾은 이환의 전 MBC 사장의 경고도 기억난다. 그는 “직원들을 광주에 보내지 말라고 했는데 취재를 시켜 사장직에서 강제로 물러나게 됐다. 스님은 아직 (무사해) 다행이다”라며 걱정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법난이 터졌다.

권력이 몇 차례 내민 손을 잡았으면 법난을 피할 수 있었을까? 여러 번 생각했지만 대답은 ‘아니다’였다. 사냥개가 쓸모없게 되면 삶아 먹는다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이 역사가 보여주는 권력의 생리다. 이 이치를 모르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은, 아무리 총칼로 일어선 무뢰배라 해도 1700년 역사의 불교를 송두리째 흔드는 법난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씨와의 인연은 후에 다시 얘기하겠다.

1980년 외로운 광주의 아픔을 함께 나누는 것은 불교, 나아가 종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다.

정리=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③회에서 송월주 스님은 30여 명의 스님이 경기 남양주시 흥국사로 끌려간 ‘불교판 삼청교육대’를 비롯해 아직 끝나지 않은 법난의 상처를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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