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하모니’ 카네기홀 울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10월 29일 03시 00분


한국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 ‘하트체임버’ 120년 사상 첫 카네기홀 공연

악보가 없다… 지휘자도 없다… 침묵의 교감만이 있을 뿐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가 올랐다. 한국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14곡의 레퍼토리 가운데 한 곡은
 공연장의 모든 조명을 끈 채 진행돼 관객들에게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악보가 없다… 지휘자도 없다… 침묵의 교감만이 있을 뿐 미국 카네기홀 무대에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가 올랐다. 한국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가 연주한 14곡의 레퍼토리 가운데 한 곡은 공연장의 모든 조명을 끈 채 진행돼 관객들에게 감동의 무대를 선사했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27일 오후 7시(현지 시간) 뉴욕 맨해튼 카네기홀 내의 ‘주디 앤드 아서 잔켈홀’. 한국의 시각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의 공연 중 갑자기 공연장 조명이 모두 꺼졌다.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27일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의 활동은 그동안 동아일보에 여러 차례 소개됐다. 본보 8월 30일자 지면. 동아일보DB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27일 카네기홀에서 공연한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의 활동은 그동안 동아일보에 여러 차례 소개됐다. 본보 8월 30일자 지면. 동아일보DB
잠깐의 술렁임 속에 무대 저 너머에서 한 줄기의 선율이 흘러나왔다. 뮤지컬 오즈의 마법사 삽입곡인 ‘오버 더 레인보’. 이 순간 모두 눈을 감고 그들의 하모니에 마음을 열었다. 곡이 끝나고 서서히 조명이 켜지자 관객들은 일어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올해로 120년 역사를 맞은 뉴욕 카네기홀에 처음으로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섰다. 2007년 12명의 시각장애인과 이들을 돕는 7명의 보조단원으로 창단된 하트체임버오케스트라는 ‘무지개 넘어 희망을 찾는다’는 오버 더 레인보의 가사처럼 이날 희망을 쏘았다. 보조단원의 손을 붙잡고 무대에 오른 이들은 처음엔 다소 불안한 모습이었다. 옆에 세워둔 악기를 찾느라 손을 더듬는 모습에 관객은 가슴을 졸여야 했다. 악보도 지휘자도 없는 공연이었지만 이들은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교감으로 2시간여 동안 14곡의 준비된 레퍼토리를 소화해 냈다. 관객들의 환호로 3곡이나 앙코르 연주를 해야 했을 정도.

이날 관객의 절반 이상이 미국 현지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안내견과 함께 공연장을 찾은 60대의 에드릭 씨는 연방 “경이적”이라며 감탄을 쏟아냈다. 역시 60대의 시각장애인인 리처드 씨는 “같은 처지에 있는 시각장애인의 공연 연주를 들은 것은 처음이다. 음악이 아니라 천상의 선율이다. 이 정도 하려면 얼마나 힘들었겠느냐”고 말했다.

사실 이번 공연은 순탄치 않았다. 비자가 출국 하루 전에 나왔고 이틀 전에 단원 한 명이 모친상을 당해 귀국하는 바람에 급히 대체 단원을 구해야 했다. 시각장애인으로 존스홉킨스 피바디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사렛대 교수로 재직 중인 이상재 단장은 “지난해 사정이 어려워 오케스트라를 해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동안 함께 고생한 단원들의 노력이 아까워 세계 최고의 무대에서 공연한 뒤 그만두자고 한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됐다”고 말했다. 카네기홀도 첫 공연 제의를 받고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한인으로 뉴욕필하모니 부단장으로 있는 미셸 김 씨가 이들의 음반을 들고 카네기홀 관계자를 설득한 것이 큰 힘이 됐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소액기부를 받아 문화예술인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단원들의 항공료를 지원했다. 한국 기업과 사회단체들도 대관료 지원을 했다.

공연을 끝내고 비 오는 초겨울 날씨의 뉴욕 거리로 나서는 그들의 모습은 편안해 보였다. 이 단장은 “공연 때 소리로 신호를 보내긴 하지만 결국 2시간가량의 악보를 다 외운 뒤 끊임없이 호흡을 맞출 수밖에 없다. 연습할 때보다 훨씬 잘했다. 머릿속의 음악을 잘 소화해냈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정말 해체할 거냐”고 묻자 “웬걸요. 오늘 공연으로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라고 답한 뒤 이 단장과 단원들은 카네기홀을 떠났다.

뉴욕=박현진 특파원 witnes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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