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명기자의 사람이야기]‘배철수의 음악캠프’ 20년 장수 DJ 배철수 씨

“애청자와 음악 나누는 행복에 묻혀…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

6일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열린 ‘배철수의 음악캠프’ 20주년 특집 콘서트에서 한 장수 청취자를 소개하는 장면. 경남 진주시에서 레코드점을 운영하며 이번 공연을 위해 올라왔다는 20년청취자가 “배 씨 손이라도 잡고 싶다”고 하자 딸 둘과 함께 무대로 초청됐다. 배 씨가 손에 들고 있는 책은 이 방청객이 선물로 가져온 구본형 씨의 ‘익숙한 것과의 결별’.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어둠이 내린 금요일(5일) 저녁 여의도. 코트 깃을 올리고 종종걸음 하는 인파를 뒤로하고 ‘배철수의 음악캠프’(MBC 라디오 FM4U 91.9MHz 오후 6∼8시)가 생방송되고 있는 라디오 방송센터 7층에 들어섰다. DJ 배 씨(57)가 서너 평 남짓한 스튜디오에서 초대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면 곧장 집으로 돌아간다는 그에게 어렵사리 인터뷰를 청해놓은 터였다. 방송이 끝나고 ‘온 에어’가 꺼진 스튜디오에 그와 마주 앉았다.

―인터뷰 잘 안 하기로 유명하던데….

“방송에서 할 이야기를 다 하는 편이라 따로 할말이 없어서….”

―‘음악 캠프’를 듣다 보면 ‘딴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세상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게 우리 프로그램 콘셉트다. 뉴스와 정보가 넘쳐나는 세상에, 그것도 하루 종일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고 돌아가는 퇴근길에 국제정세가 어떻고 엔화가 어떻고, 우리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다. 나의 실없는 농담으로 (청취자들이) 피식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너무 가벼운 거 아닌가.

“나는 굉장한 개인주의자다. 무슨 일이건 내가 행복해야 한다. 아버지가 행복해야 자식도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해야 국가가 행복하다. 나도 중고등학교 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태어난 줄 알았다(웃음). 살아보니까 민족중흥도 개인의 행복이 먼저더라.”

―음악 틀어주면서 월급 받으니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감옥이 없어 보인다. 20년 동안 지루하지 않았나.

“(파안대소하며) 하하. 나도 몰랐는데 내가 꽤 규칙적인 생활에 잘 맞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봉두난발도 하고 머리도 묶고 히피처럼 살았다. 하지만 자유에는 대가가 따른다. 불안정하고 불규칙한 생활이 가져다주는 불안은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 그래서인지 규칙적인 생활에서 편안함과 안도감을 느낀다.”

―1990년 3월 19일 첫 방송 이후 PD만 스물네 명을 거쳤다. 장수 비결을 말한다면….

“글쎄,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광고 섭외도 거절한다고 들었다. 돈에 대해 별로 욕심이 없나.

“돈 많은 사람들 많이 만나볼 기회가 있었는데 별 다를 게 없더라. 인생에서 돈은 필요하지만 최고는 아니더라. 아내가 닦달했으면 나도 달라졌을 텐데 아내도 소박한 사람이다.”(두 사람은 ‘음악캠프’ 첫 PD와 진행자로 만나 결혼했다. 부인은 현재 MBC라디오 부국장이다.)

―행복이 목표라고 했는데, 행복이란 게 뭐냐.

“뭐, 무지개 너머 있는, 큰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방송할 때 행복하다. 청취자들로부터 ‘이 노래 정말 듣고 싶었다’는 사연이 올 때, 보고 싶은 후배와 수다 떨 때 행복하다. 어떤 목표를 이뤘을 때 찾아오는 행복은 잠시였던 것 같다. 과정이 중요한 것 같다. 대학 때 수업 빼먹고 연습실에 모여 우리가 하고 싶은 곡을 ‘뗐을 때’ 가장 행복했다. 나도 굶어봐서 아는데 밥을 못 먹는 것은 비참하다. 하지만 굶는 수준을 벗어나면 마음먹기 따라서 행복 불행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죽음에 대한 경험이 있다고 들었다.

“송골매 시절인 1983년 감전사할 뻔했다. 인생관이 많이 바뀌었다. 삶에 겸손해졌다고나 할까.” 7년 전, 가장 친했던 친구가 갑작스레 대장암으로 죽은 일도 큰 충격이었다고 했다.

듣고 보니, 그에게서 느껴지는 겸손함이나 성찰은 초년의 혹독한 경제적 궁핍과 죽음에 가까이 가본 경험들이 가져다준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어떤 인터뷰에서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절을 “가세가 기울었던 중고교 시절”이라면서 “모든 게 불평불만으로 가득했던 청춘을 보내서인지 어려운 사람들 마음을 헤아리려 노력하는 편”이라고 했다.

유명인들을 만나보면 실제 모습과 만들어진 모습 사이에서 괴리감이 느껴지거나 ‘소통’에 애를 먹을 때가 많다. 인터뷰 자체도 하나의 연기로 여기다 보니 진심을 끄집어내기 어렵고 ‘자신의 생각’이 아닌 ‘남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배 씨는 달랐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자연스러웠다.

―어떻게 직업 음악가가 되었나.

“늙으면 운명론자가 된다(웃음). 음악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내게 도피처였다. 대학가요제에서 상도 탔지만 주변에서 다들 말렸다. 나도 대한항공에 거의 취직이 확정됐던 상태였는데 마침 방송국 PD로 입사한 동생(현재 SBS제작본부장 배철호 씨)에게 ‘형이 음악을 하고 싶은데 해도 되겠느냐’고 했더니 기꺼이 허락해줬다. 동생이 없었다면 나도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을 거다.”

―유신시절 대학을 다녔는데 음악에만 빠져 있었다.(그는 항공대 전자공학과 72학번이다).

“군인들이 총 들고 학교 문 앞에 서 있던 시절, 담 넘어 들어가 밴드 연습했다. 나중에 많은 사람이 민주화투쟁을 하고 감옥까지 간 것을 알고 정말 미안했다. 하지만 난 나대로 음악과 방송을 통해 조금이라도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름대로 의미 있었던 일 아니었을까.”

그는 가수로 출발했지만 지난 20년 동안 누구보다 많은 팝 음악을 듣고 소개한 대중음악전문가다. 올 초에는 ‘음악캠프 20년 그리고 100장의 음반’이란 책도 냈다.

그러고 보니 최근 인기리에 막을 내린 ‘슈퍼스타K’ 마지막 우승자 발표를 그가 했었다.

―왜 그 프로가 화제가 되었다고 보나.

“노래 본연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볼 때마다 ‘듣는 감동’이 있었다. 가수라도 노래 못하는 사람 많다. 마이클 잭슨의 퍼포먼스가 굉장했다 해도 기본은 노래였다. 립싱크를 하면서 퍼포먼스 하는 것도 한 장르라고 한다면 ‘싱어’가 아니라 ‘립 싱커’ ‘퍼포머’라고 해야 한다.”

―그 프로를 주로 젊은 사람들이 열광한 것을 보면 노래에서 받는 감동은 세대를 뛰어넘는 것 같다.

“젊은 세대는 그런 ‘감동’을 기다렸다고 볼 수 있다. 얼마 전 방송된 예능프로 ‘남자의 자격’ 합창 편을 보고 운 사람들도 있다. 노래라는 게 원래 그런 거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번쯤 노래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돈 적이 있지 않나. 나는 지금도 최백호 형 노랠 들으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노래에 꼭 ‘눈물’이 있어야 하나.

“너무 획일적이라는 게 문제라는 거다. 퍼포먼스도 좋지만 그거 일색이면 지루하다. 문화는 다양해야 한다.”

―‘슈퍼스타K’ 출연자들이 남의 노래로 떴기 때문에 비전이 없을 것이란 지적도 있다.

“모든 음악은 다 모방에서 시작됐다. 비틀스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다. 점점 자기 음악을 만들게 될 거다. 그래서 그들에겐 지금부터가 ‘시작’인 거고….”

―잠재력이 있어 보이던가.

“1, 2등이 중요한 게 아니다. 결승에 진출한 11명 중 누가 스타가 될지는 모른다.”

―스타가 되는 것은 운인가.

“이게 참 불공평한 것 같은데…. 노력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재능이 먼저다, 특히 예술분야에선. (잠시 침묵) 그런데, 꼭 스타가 되어야 하나.”

그의 말이 이어졌다.

“음악의 길을 가는 것과 스타의 길을 가는 것은 다르다. 10년 전 하와이에 간 적이 있다. 크지 않은 쇼핑센터에서 40대 중반의 기타리스트가 공연을 하는데 예사 연주가 아니었다. 뉴욕에서 밴드를 해도 충분할 텐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즐겁게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음악을 하는 거다. 뭐든 1등을 하라는 법은 없다.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는데 그 소수에 들지 못하면 모두 패자가 되는 느낌을 갖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

―‘콘서트 7080’(KBS)을 6년째 진행하고 있다. 7080시대 노래가 이렇게 오랫동안 듣고 불려지는 이유는 뭔가.

“클래식도 그 시절 대중음악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베토벤 모차르트 음악을 지금까지도 듣는다. 1960, 70년대 팝음악도 마찬가지다. 대중음악사를 보면 어느 한 시절 시대를 뛰어넘는 음악들이 나오는 때가 있다. 우리의 경우 7080시대가 그렇다. 100년 후 사람들도 들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 중년세대는 그런 시대를 겪었고 살았다. 조용필 노래엔 뽕짝부터 록까지, 인생의 희로애락이 다 담겨 있다. 우리는 그걸 생(生)으로 보고 들었다.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젊은 문화에 주눅 들지 말고 그런 것을 당당하게 들려줘야 한다.”

이튿날 토요일(6일) 오후 6시 반,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에서 ‘그의 20년’을 기념하는 공연 ‘음악캠프 20+’가 열렸다. 가수가 아닌 DJ의 이름을 연호하며 신나는 음악에 맞춰 넥타이를 맨 50대 60대, 10대 20대가 한데 어울려 환호하는 무대는 실로 이색적이었다.

‘고락(苦樂)에 겨운 내 입술로 모든 얘기할 수도 있지만 나는 세상모르고 살았노라’…. 출연진의 마지막 합창곡이자 오래전 그가 불렀던 ‘세상모르고 살았노라’가 오래 남았다.

광속으로 변화하는 시대에 20년을 한결같이 살아 온 ‘DJ 배철수’의 성공은 그의 가사대로 ‘세상을 몰랐기 때문’ 아니었을까. 최근 일본 팝음악을 평정한 ‘소녀시대’의 성취가 있다면 ‘음악캠프’의 성취도 있다. 삶의 다양한 무늬를 보여주는 문화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