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 보면 아픔 잊고…그리고 나면 용기 얻죠

동아일보 입력 2010-09-11 03:00수정 2010-09-1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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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벽화 그려 ‘그림 치료’ 존 파이트 병원예술재단 이사장
10일 건보공단 일산병원에서 만난 존 파이트 병원예술재단 이사장(오른쪽)과 4년 전부터 아버지의 일을 돕는 아들 스콧 씨. 그의 그림에는 꽃과 물고기, ‘희망’을 상징하는 나비가 자주 등장한다. 사진 제공 화이자
“100년 전에는 병원이 깨끗하기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깨끗한 벽만으론 부족해요. 병원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10일 경기 고양시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에서 만난 존 파이트 병원예술재단(www.hospitalart.org) 이사장과 자원봉사자 등 12명은 하얀 캔버스 위에 도안을 그리고 있었다. 꽃과 나무, 물고기 형태가 서서히 드러났다. 이 재단은 전 세계를 돌며 병원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자원봉사 단체. 이들은 환자들이 쉽게 그림 그리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안마다 미리 손톱 크기만큼씩 물감을 찍어 놓았다. 찍힌 물감대로 색을 칠하다 보면 그림이 완성됐다. 오가던 환자들이 궁금해하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파이트 이사장이 한국은 찾은 지는 올해로 10년째. 2002년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을 시작으로 매년 병원 세 곳을 선정해 환자, 의료진,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올해 선정된 건보공단 일산병원, 일산백병원, 인하대병원과 장애아동시설 승가원까지 합치면 그의 손길이 닿는 곳은 27곳이다. 병원 벽에 바로 그림을 그릴 때도 있지만 환자들이 캔버스에 각자 맡은 부분을 나눠 그린 뒤 나중에 ‘합체’하기도 한다.

파이트 이사장은 1974년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전을 열 정도로 주목받는 젊은 예술가였다. 그림 치료에 눈을 뜬 것은 1976년 미국 조지아 주 노스사이드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할 때였다. 환자들이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는 병원 벽은 허옇기만 했다. 환자들은 멍한 눈빛으로 시간을 때울 거리를 찾았다. 그는 얼룩말과 드넓은 자연을 벽에 그리기 시작했다. 벽화를 감상하고,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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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비로 물감과 캔버스를 사서 환자들에게 나눠줬다. 몸이 불편한 환자들을 위해 벽화가 아닌 6장 캔버스로 작품을 쪼갠 뒤, 나중에 모아 붙였다. 몸을 움직일 수 없는 환자들도 침상에서 열심히 맡은 부분을 완성했다. 1984년에는 비영리 비정부기구(NGO)인 병원예술재단을 만들었다. 이 소식을 들은 화이자제약이 적극 지원하면서 지금까지 전 세계 166개국 800여 개 병원에서 3만여 점을 그렸다. 4년 전부터는 아들 스콧 씨도 그림축제를 돕고 있다.

파이트 이사장이 가장 잊을 수 없는 환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만난 여성 환자. 이 환자는 심장 모양의 붉은색 하트가 나뭇잎처럼 무성하게 달려 있는 ‘러브트리’라는 작품을 좋아했다. 이 환자가 사망하던 날, 그녀의 오빠는 파이트 이사장에게 전화했다. “동생이 용기를 얻었던 그 그림에 보라색 하트 하나만 더 그려줄 수 있을까요?” 파이트 이사장은 보라색 하트를 하나 더 그린 뒤, 그 여성 환자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파이트 이사장은 4년 전 한국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기자에게 보여줬다. 예닐곱 살쯤 된 소녀가 붓으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람은 눈이 두 개뿐이어서 아름다운 것에 먼저 시선을 뺏기지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자기가 아프다는 사실을 잊고, 보는 사람도 상대가 환자란 걸 잊어요.”

다시 사진을 자세히 보니, 그제야 소녀의 양발에 철제로 만든 치료기계가 달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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