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빈자리 더 커져만 갑니다”…손기정 선생 오늘 4주기

  • 입력 2006년 11월 15일 03시 00분


《"나라 없는 백성은 개와 똑같아. 만약 올림픽 시상식에서 일장기가 올라가고 일본국가인 기미가요가 연주되는 것을 알았다면 난 결코 달리지 않았을 거야." 1936년 8월9일 베를린올림픽 스타디움. 식민지 조선청년 손기정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신발을 벗어들고 트랙을 걸어 나갔다. 시상대에서도 그의 시선은 땅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은 금방 울음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았다. 15일은 손 기정 선생의 4주기. 갈수록 그의 빈자리가 크다. 그는 오직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달렸다. 민족영웅이라고 해서 나라에 뭘 바라지도 않았다. 묵묵히 후배들을 키우는데 온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제 그가 낸 숫길은 아득하다. 잡초가 우거지고 흙먼지만 자욱하다. 》

1945년 광복 후 손기정(1912∼2002·사진) 선생은 묵묵히 마라톤 후진 양성에만 매달렸다. 정치 쪽에서 유혹이 많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전국의 꿈나무 20여 명을 뽑아 서울 성북구 안암동 자신의 집에서 밥을 먹여 가며 훈련을 시켰다. 훈련은 매일 새벽 장독대의 태극기 아래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수시로 김구 선생, 이범석 장군 등을 모셔다가 민족정신을 북돋우는 강연을 듣기도 했다. 제자 서윤복은 “손 선생님이 우리 합숙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손 선생님은 우리에게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해줬기 때문에 너도나도 서로 들어가려고 했다”고 말했다.

1947년 서윤복이 보스턴마라톤에서 2시간 25분 39초의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1950년 보스턴마라톤에선 역시 그가 길러낸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 2, 3위를 휩쓸었다.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최윤칠이 4위,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선 이창훈이 4위를 기록했다. 모두 손 선생의 작품이었다.

15일은 손 선생 4주기. 게다가 올해는 손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70돌 되는 해다. 한국 마라톤은 손 선생으로부터 시작해 황영조 이봉주가 그 맥을 이어 왔다. 하지만 이제 아무리 돌아봐도 손 선생의 ‘마라톤 정신’을 이을 후배는 보이지 않는다. 서른여섯의 이봉주도 마라토너로선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세계는 저만치 줄달음쳐 앞서 가고 있는데 갈수록 한국 마라톤은 뒷걸음질이다. 세계최고기록은 2시간 4분대인데 한국 마라톤 선수 중 지난해와 올해를 통틀어 2시간 10분 이내에 들어온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손 선생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땐 냉수로 배를 채우고 달렸다. 배가 너무 고파 도저히 달릴 수조차 없었던 적도 있다. 생전에 손 선생은 “난 배만 부르면 반드시 1등을 했어. 그런데 요즘 후배들은 거꾸로야. 조금만 배가 부르면 달리지 않으려고 한단 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손 선생은 가슴이 두꺼운 데다 마라토너로서 이상적인 체격(167cm, 55kg)을 타고났다. 하지만 그의 피눈물 나는 노력이 없었다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불가능했다.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매달고 달리는가 하면, 올림픽선수촌에선 새벽에 남몰래 일어나 별도 훈련을 할 정도였다.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은 변변한 전기(傳記)조차 없다. 그의 유품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나마 제대로 국민에게 전시조차 되지 않고 있다. 그의 외손자(이준승·39)가 사재를 털어 세운 ‘손기정 기념재단’은 궁여지책으로 ‘손기정 베를린 마라톤 제패 70주년 기념 메달’ 발매에 나섰다.

여기서 생기는 수익금으로 손기정기념관을 만들겠다는 계획. 한국조폐공사가 제작한 순금 99.9%의 이 메달(1온스 179만 원)은 15일부터 내년 1월 말까지 전국 국민은행 본점과 지점에서 판매된다. 메달판매업체인 오륜문화사 김명기 대표는 “손 선생의 마라톤 정신이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말년에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했다. 왼쪽 다리 동맥 경화증 때문에 지팡이에 의지하고도 100m를 20분이나 걸려서 갈 정도였다. 기자가 찾아가면 “밖에 나가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고 얘기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렇게 꼼짝을 못 하니…”라며 “그나저나 마라톤 인생보다 인생 마라톤이 훨씬 힘든 것 같구먼”이라고 쓸쓸하게 말했다.

소년 시절부터 수많은 길을 달리고 달렸던 손기정. 한때 42.195km를 이 세상에서 가장 빨리 달렸던 사나이. 손 선생은 지금도 저승에서 한국 마라톤의 장래를 걱정하며 애간장을 태우고 있지나 않을까?

김화성 스포츠전문기자 mar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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