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 독자인권위 좌담]목적-수단 정당하면 함정취재 인정돼야

  • 입력 2004년 10월 7일 18시 24분


코멘트
왼쪽부터 문혜진 위원, 이영모 위원장, 유의선 위원, 장용석 위원. 전영한기자
왼쪽부터 문혜진 위원, 이영모 위원장, 유의선 위원, 장용석 위원. 전영한기자
《기자의 신분을 감춘 채 상대방을 유인 취재하는 ‘함정취재’는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 본보 독자인권위원회 제18차 정기회의가 5일 오후 본사 14층 회의실에서 열려 이런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였다. 인권위원들은 함정취재가 원칙적으로 바람직하지는 않지만 다른 취재수단이 없는 경우 등 불가피할 때는 허용될 수 있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취재 목적의 공익성이 확실하고 취재과정의 윤리성이 뒷받침된다면 함정취재에 대해 좀 더 유연한 기준을 적용하는 융통성이 요구된다고 인권위원들은 강조했다.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함정취재는 통상적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진실의 현장’을 폭로하는 기사를 쓸 때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반면 취재목적을 위해 파 놓은 함정에 빠진 상대방으로서는 사적인 내밀한 모습이 익명으로나마 생생히 노출된다는 점에서 내심 수치심과 불쾌감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함정취재가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지요.

▽문혜진 위원=함정을 파 놓고 상대방을 유인하는 취재방식은 상식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보 내용을 검증하기 위한 추가 취재에 정상적인 방법이 없다면 의심 가는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확인하는 수단으로서 어느 정도 용인할 수는 있겠지요. 이 경우에도 확인을 위한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불가피성’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영모 위원장=독자의 알권리 및 표현의 자유와 마찬가지로 취재의 자유도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법학계의 다수 의견입니다. 함정취재가 형사사건으로 번지는 경우 사회통념상 ‘상당한 취재수단’을 사용했고 보도가 ‘공공의 이익’에 합치된다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봐야겠지요. 일본에서는 기자가 외무성의 여성 사무관에게 은밀하게 접근해 유혹해서 기밀문서를 빼내 보도했다고 해서 법원이 유죄판결을 내린 사례도 있었지요. 수단이나 방법이 윤리적으로 떳떳하지 못했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장용석 위원=함정취재 또는 위장취재에는 법률적으로 함정수사와 유사한 쟁점들이 발견됩니다. 범죄 수사 과정에서 마약 매춘 등은 통상적인 함정수사의 대상입니다. 심지어 뇌물죄에 이르기까지 함정수사의 결과물이 형사재판에서 적법한 증거로 채택된 외국의 사례도 있습니다. 목적의 정당성, 수단의 적절성, 피해의 최소성, 법익의 균형성, 반론기회 보장 등 요건을 갖춘 상태라면 함정취재에 대해서도 좀 더 유연한 기준의 적용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유의선 위원=합법적 요소를 확보하고 공공의 이익을 담보한다면 표현의 자유를 위한 취재의 자유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다수의견입니다. 다만 윤리적으로 떳떳하지 못한 함정취재는 허용되기 어렵겠지요. 원조교제 밀렵 등을 대상으로 한 ‘몰래카메라’가 오히려 비행을 유도하고 불법을 조장하는가 하면 성매매 등 선정성 짙은 내용에 함정취재의 초점을 맞추는 사례가 현실적으로 눈에 자주 띄는 편이거든요.

―함정취재가 사회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데에 위원 모두 동의하셨는데,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그 범위는 어디까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본보도 지난달 20일자의 ‘어, 초등생이 포르노 주인공?’이란 기사에서 음란한 화상대화의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가 ‘13세 여자 초등학생’을 가장해 채팅사이트에 접속해 상대방을 유인한 일이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영모=동아일보 보도사례의 경우 함정취재를 했더라도 인격권이 침해됐다고 볼 여지가 없고, 인터넷상에서 그런 일까지 벌어지고 있구나 하는 점을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보도가치가 크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보도를 통해 상대가 누구인지 특정된다면 법적으로 프라이버시 침해나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으니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유의선=동아일보 사례는 온갖 음란물과 폭력적 표현들이 난무하는 인터넷 세계에 대해 경종을 울린다는 차원에서 보도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다만 불법을 유발하고 조장하는 내용이라면 윤리적인 문제가 뒤따르겠지요.

▽장용석=제3자간의 대화나 행동을 담는 몰래카메라는 명예훼손 등 위법성 문제가 뒤따를 수 있고 법적으로 증거 능력도 부인되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상황 속의 당사자가 바로 취재의 주체가 되는 함정취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융통성을 부여하는 추세이고 관련 자료의 증거 능력도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문혜진=인터넷 공간에서는 취재 상대방도 기자에게 함정을 놓을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럴 경우 취재 내용의 사실 여부에 대한 신뢰성에 의문이 생길 수도 있지요. 나아가 함정취재가 지나치게 선정성에 흐르는 경향을 보이는 데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구체적인 방법을 안내하고 조장하는 등 역작용마저 우려되는 만큼 함정취재 자체가 가진 ‘함정’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함정취재 결과를 보도할 때 보통은 익명보도, 얼굴 모자이크 처리, 음성변조 등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인권침해 방지를 위해 그 밖에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장용석=독자의 알 권리를 충족시킨다는 차원에서 탐사저널리즘의 존재 의의가 강조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렇더라도 함정취재의 필요성 여부 판단과 구체적인 취재방식 등에 관한 강령이나 준칙을 언론사가 자발적으로 마련하고 이를 지키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유의선=언론이 사회 감시 고발기능을 담당하자면 불가피하게 함정취재 방법을 동원할 수도 있는데, 실제 이 방법을 어디에 쓰는가가 관심사입니다. 정치나 종교 같은 거대 권력에 대해서는 선뜻 건드리지 못하면서도 선정적 내용을 고발하는 등의 만만한 상대에게만 손쉽게 함정을 파 놓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정취재가 한탕주의와 상업주의에 매달리고 경쟁과 왜곡을 불사하는 등 이른바 ‘하이에나 저널리즘’에 매몰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문혜진=특정 인물보다는 고발 내용의 공익성이 중요한 사안인 경우 개인의 인격권은 더욱 존중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일정 부분 프라이버시 손상을 감수해야 할 공인에 대해서까지 익명으로 흐려 버리는 보도사례를 대하게 될 때는 독자로서 은근히 화가 나기도 합니다.

▽이영모=함정취재는 원칙적으로 피하면 좋을 것이고, 불가피한 상황이더라도 ‘최후의 수단’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절대로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 함정취재의 이유를 공개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직업윤리상 떳떳해야 사회적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요.

정리=김종하기자 1101h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