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인권을 생각합니다]흉악범 호칭 어떻게

  • 입력 2004년 9월 5일 18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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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독자인권위원회 위원들이 ‘보도할 때 흉악범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를 주제로 좌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문혜진 위원, 이영모 위원장, 유의선 위원, 장용석 위원. 이종승기자
동아일보 독자인권위원회 위원들이 ‘보도할 때 흉악범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를 주제로 좌담하고 있다. 왼쪽부터 문혜진 위원, 이영모 위원장, 유의선 위원, 장용석 위원. 이종승기자
《독자들의 권익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동아일보 독자인권위원회 제17차 정기회의가 2일 오후 3시 본사 14층 회의실에서 열려 ‘보도할 때 흉악범을 어떻게 호칭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벌였다. 인권위원들은 흉악범이라도 인격권, 무죄추정의 원칙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흉악범죄를 미워하는’ 국민의 법감정도 고려해야 한다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일부 위원은 검거, 수사, 재판 단계에 따라 ‘용의자’ ‘피의자’ ‘피고인’ 등을 이름 뒤에 붙이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씨’자 존칭에 대해 명백한 흉악범의 경우는 ‘보호할 인격적 가치’가 없다고 보아 붙이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과 ‘씨’를 반드시 붙여 언론도 인격권을 존중한다는 기본원칙에 충실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맞섰다. <사회=육정수 본보 독자서비스센터장>》

―20여명을 연쇄 살해한 혐의로 최근 검거된 유영철씨 사건을 보도하면서 본보처럼 그의 이름 뒤에 ‘씨’를 붙인 신문이 있었는가 하면, 어떤 신문은 일본 신문들처럼 ‘용의자’ 또는 ‘피의자’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어떤 신문은 아예 이름 석자만 쓰기도 했습니다. 경찰관 2명 살해혐의자 이학만씨에 대해서도 신문들의 태도는 갈렸습니다.

▽문혜진 위원=인격권은 그 자체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인격권이나 무죄추정의 원칙은 마땅히 지켜야 할 기본이라는 점에서 경범이냐 중범이냐를 구분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어느 경우에도 반드시 ‘씨’라는 존칭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의선 위원=원칙적으로는 동의합니다. 범죄사실 보도에서 인격권의 침해를 최소화하려는 신중한 접근이 요구되지요. 무죄추정의 원칙이 그렇고, 피의사실 공표금지 원칙이 그렇습니다. 다만, 유영철씨의 경우처럼 범죄사실이 명백하고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범죄라면 인격권을 어디까지 존중해야 하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외국의 경우 언론사의 판단기준에 따라 실명으로 보도하는 것은 물론 ‘씨(미스터)’마저 붙이지 않는 사례가 많습니다. 미국에서는 연쇄살인범 관련 명예훼손 소송 사건에서 ‘더 이상 잃을 명예가 없다’는 논리로 국민 법감정의 중요성을 강조한 판결도 있었어요.

▽이영모 위원장=정확하고 적절한 표현은 독자의 신뢰를 얻는 데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검거나 경찰 수사착수 당시에 신문에서 ‘피의자’라고 쓰는 것은 조금 이상하고 일본식 표현을 따라가는 것 같지만 ‘용의자’ 정도가 무난하다는 생각입니다. 유영철씨의 경우처럼 ‘진범’이라는 국민적 인식이 유력한 사안에서 ‘혐의자’라고 쓰기에는 느낌이 약하고, ‘씨’를 붙이기엔 존칭 기분이 들어 어색한 것 같습니다.

▽장용석 위원=비록 흉악범이라 하더라도 인격권 자체는 보호의 대상이라고 봐야 합니다. 나아가 무죄추정의 원칙이라는 취지에 비춰볼 때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가피하게 실명을 보도한다 하더라도 입건 전과 후, 기소 후 등 단계에 따라 호칭을 구분해 사용하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즉, 입건 전은 ‘용의자’, 입건 후에는 ‘피의자’, 기소 후에는 ‘피고인’으로 구분하면 어떨까요.

―이 문제에 대한 논의에서는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누구나 확정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로 본다는 법률상의 무죄추정의 원칙과 인격권이고, 또 하나는 흉악범죄를 미워하는 국민의 정서에 입각한 것이죠. 다시 말해 인권을 고려한 법규정과 악(惡)을 용납하지 않는 법감정의 충돌로 볼 수 있겠습니다. 최근 형사법에서 ‘피해자학’이라는 새로운 분야가 논의의 대상이 돼 있듯이 희생자 및 그 가족의 입장과 감정도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습니다만….

▽문혜진=보도의 초점을 어디에 맞출 것인가 하는 접근시각이 핵심이라고 봅니다. 피해자의 입장만 강조할 경우 자칫 독자의 감정이나 정서를 부추겨 분노를 조장하는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유영철이 인육을 먹었다’는 식의 보도는 본인의 진술에만 의존한 것일 뿐 수사기관이 증거를 확보하지 못한 수준이거든요. 제3자적인 시각에서 보다 차분하고 ‘쿨하게’ 접근해가는 진지함이 절실합니다.

▽장용석=공감합니다. 사건 사고를 보도하면서 언론이 유념해야 할 대목은 자칫 흥미 위주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로 흐를 우려가 있다는 점입니다. 선정적 보도를 피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지켜나가려는 노력은 언론에 주어진 태생적인 과제라고 봅니다.

▽유의선=무죄추정의 원칙이나 피의사실 공표금지 등 법리로만 따진다면 선정적 보도는 자제돼야 마땅하겠지요. 다만, 유영철씨 사건처럼 사회통념상 반인륜적인 흉악범죄라는 인식이 명백한 경우라면 달리 고려할 대목이 있습니다. ‘난도질’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극진한 대우’도 곤란합니다. 과연 유씨에게 ‘보호할 만한 인격적 가치’가 남아 있는 것일까요.

▽이영모=흔히 가해자의 인권에 대해 논의의 초점이 집중되다 보니 피해자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사례를 자주 보게 됩니다. 피해자의 인권이나 감정 역시 가해자에 못지않은 비중으로 존중돼야 마땅합니다. 반면 가해자의 가족에 대해서는 아무리 범죄사실이 명백하고 국민적 궁금증이 크다 하더라도 알 권리의 대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씨’ ‘용의자’ 등으로 호칭해 인격을 보호하는 자세를 보이면서도 ‘희대의 살인범’ 등의 단정적 표현을 함께 써서 일관성을 잃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법원의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진범으로 낙인찍는 ‘신문재판’이 아니냐는 비판입니다만….

▽유의선=표현의 자유를 위해서는 적어도 언론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겠지요. 가령 검찰의 공식발표 내용을 보도했는데도 나중에 진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고 해서 그 때마다 손해배상청구를 당한다면 언론이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당연히 국민의 알 권리마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결과를 낳게 되겠지요.

▽이영모=단정적인 표현으로 인해 당사자가 재판상 불이익이나 정신적 피해를 보게 됐다고 호소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통념이나 일반인식에서 지나치게 동떨어진 보도가 아닌 한, 국민 대다수의 생각을 보도에 반영한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정의’가 아닐까요.

▽장용석=문제의 핵심은 헌법상의 인격권과 언론의 자유 및 국민의 알 권리, 나아가 범죄로부터 사회를 보호할 필요성 등이 부딪치면서 발생하는 법적 이익의 충돌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있다고 봅니다.

▽문혜진=언론이 원칙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언론은 법감정을 앞세워 항의하고 분노하는 독자에 대해서도 인권이 왜 중요하고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리=김종하기자 1101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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