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추산 권기일선생 손자 권대용씨

  • 입력 2004년 8월 24일 18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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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권기일 선생의 손자인 권대용씨가 자신의 집 거실에서 추산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보여주는 일제의 비밀문서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안동=유재동기자
추산 권기일 선생의 손자인 권대용씨가 자신의 집 거실에서 추산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상을 보여주는 일제의 비밀문서 등을 어루만지며 생각에 잠겨 있다.-안동=유재동기자
“지금 제 처지는 넉넉지 않지만 부친과 조부가 자랑스럽습니다.”

경북 안동의 명가(名家)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12대 주손(胄孫·맏손자)인 권대용(權大容·57)씨는 독립운동가 추산 권기일(秋山 權奇鎰) 선생의 손자다.

하지만 추산 선생이 1912년 만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면서 3000섬지기로 40여명의 노비를 뒀던 명문거족의 자취는 10여년 만에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추산은 전 재산을 털어 이시영(李始榮) 선생, 김좌진(金佐鎭) 장군 등과 함께 만주에서 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하다 1920년 일본군에게 살해됐다. 그의 아들 형순(衡純)은 광복과 함께 1945년 9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형순씨는 거리에서 부인과 함께 리어카 간장 행상으로 연명했다. 안동 일대에선 양반의 장손이 행상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화제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더니…”하는 수군거림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형순씨는 평생 부친과 가문에 대한 자긍심을 잊지 않았다. “술 찌꺼기를 먹고 살아도 일본 놈 밑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며 고된 생활을 견뎌냈지만 가난은 끊이지 않았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한 그의 아들 대용씨는 현재 30여 년째 안동에서 택시를 운전하고 있다.

1977년 뒤늦게 추산의 공로가 인정돼 건국포장을 받고 지금은 월 60만원 정도의 연금 등 보훈혜택을 받고 있지만 가문의 옛 위풍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이다.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용씨는 “젊었을 때 한두 번 왜 원망이 없었겠느냐”며 “친척들이 못 살고 못 배웠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볼 때면, 거꾸로 된 세상을 개탄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요즘 그는 “가족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것만도 조상의 음덕이 아니겠느냐”며 웃는 여유를 갖고 있다.

안동=길진균기자 leon@donga.com

유재동기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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