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물질적 남자’ 노인역 맡은 의사배우 이항 씨

  • 입력 2003년 8월 19일 18시 54분


연극 ‘물질적 남자’에 출연하는 의사 겸 배우 이항 한양대 교수. 이 교수는 서울 토박이인데도 전라도 사투리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주성원기자
연극 ‘물질적 남자’에 출연하는 의사 겸 배우 이항 한양대 교수. 이 교수는 서울 토박이인데도 전라도 사투리를 자유롭게 구사한다. -주성원기자
“염소야! 일루 와아! 흑염소야! 암흑염소야! 숫흑염소야! 새끼 흑염소야아! 하, 이것들이 구름을 뜯어먹으러 올라가네이?”

전라도 억양으로 대사를 하는 모습이 여간 노련하지 않다. 삼베 적삼을 입고 무대 위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품도 영락없는 시골 노인이다. 의과대 교수 겸 연극배우 이항(李恒·61· 한양대 의대 소아과학 교실)씨는 29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개막하는 극단 돌곶이의 작품 ‘물질적 남자’에 출연하기 위해 맹연습 중이다.

이 교수는 소아혈액 종양학의 권위자. “의사가 웬 연기?”라는 의문도 들지만 그는 원래 연극에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경기중고교 시절 연극반 활동에 이어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뒤 아예 연극부를 만들었다. 이후 미국 유학시절 주말마다 연극을 관람했다. 주위에서는 “국내 연극인 중 공연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

“저는 아마추어 배우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연극에 대한 관심만큼은 프로라고 말할 수 있지요. 프로 관객이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그의 활동은 아마추어의 영역을 넘어선다. 2000년 연극 ‘나비의 꿈’(화동연우회)을 연출했고, 이듬해에는 ‘러브레터’(극단 한양레퍼토리)에 출연했다. 20일 개막하는 연극 ‘프루프’는 직접 번역했다. 1983년 한양대 의대 교수가 된 뒤 의사들의 연극 모임인 ‘의극회’에서 연출과 출연을 두루 맡아오기도 했다.

‘물질적 남자’(황지우 극본, 윤정섭 연출)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소재로 한 작품. 실물 크기의 사람 인형과 영화관 못지않은 서라운드 음향시설 등 기존 연극에서는 보기 어려운 장치도 도입된다. 이 교수는 이 연극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신비의 노인으로 출연한다.

“6월 말경 ‘이 교수에게 이미지가 맞는 작품이 있다’고 연출가 윤 선생이 제의해 왔어요. 망설이는데 덜컥 배역이 정해졌어요. 그날부터 걱정으로 매일 잠을 못 이루고 있죠.”

매일 오후 5시까지 진료와 강의를 마친 뒤 연습장을 찾는 그는 “배우와 스태프가 열심히 준비하는데 나 때문에 작품이 망가져서야 되겠느냐”며 오후 11시까지 비지땀을 흘리며 두 인생을 살고 있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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