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만행의 역사기록」을 첫 공개증언했던 「정신대할머니」 김학순(金學順·73)씨가 전 재산 1천7백여만원을 교회에 기증하고 한많은 이승과 작별했다.
16일 오전 1시경 서울 이화여대부속병원에서 기구한 삶의 여정을 마감한 뒤 서울중앙병원으로 옮겨진 김씨의 빈소에는 무궁화와 하얀 국화꽃이 외롭지만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1940년 중국에 주둔하던 일본군 부대로 끌려 갔던 김씨는 수개월 뒤 한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에서 탈출, 깊은 상처를 안은 채 새 인생을 시작했으나 「강요된 원죄(原罪)」는 평생 그를 쫓아 다녔다.
자신을 구해준 조선인 상인과 결혼해 사랑을 받으며 지낸 세월도 없지 않았으나 남편은 끝내 술에 취하면 『너는 위안부출신이야. 나 아니면 벌써 죽었어』라며 학대하곤 했다.
6.25 때 딸과 남편을 잃고 마지막 의지의 대상이었던 아들마저 초등학교 4학년 때 물에 빠져 죽자 김씨는 서울 종로구의 한 판잣집에 세들어 살며 가정부 식당종업원 등으로 일했다.
91년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둔 8월14일.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찾아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반세기 가까이 가슴에 묻어둔 일본군위안부로서의 한(恨)을 실명(實名)으로 증언했다.
『정신대위안부로 고통받았던 내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데 일본은 「위안부를 끌어간 사실이 없다」고 거짓말을 하고 우리 정부는 「모르겠다」고 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절규의 목소리로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그 후 그는 서울 종로구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열리는 정신대 항의집회에 빠짐없이 참가하고 일본 국회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 등 정신대 문제를 국제사회의 문제로 이슈화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정대협 관계자들은 『20년 넘게 기관지 천식으로 고생해온 김할머니는 건강 때문에 해외에 직접 나가 국제사회에 일본의 만행을 적극적으로 고발하지 못하는 걸 늘 아쉬워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김씨는 숨을 거두기 전 평생 동안 모은 1천7백여만원을 『나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위해 써달라』며 자신이 다니던 서울 동대문감리교회에 소문없이 맡겼다. 자신의 장례비로 현금 2백만원만을 남겨놓은 채….
이 교회 장기천(張基天·67)목사는 『자신이 당했던 나라 뺏긴 민족의 아픔을 개인적인 한으로 남겨두지 않고 역사적 교훈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여인』이라고 추모했다.
〈부형권·이명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