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울어드립니다”[허명현의 클래식이 뭐라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1월 17일 23시 10분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우리는 종종 울지 못한 채 살아간다. 슬픔을 마음 놓고 표현한다는게 쉽지 않다. 우선 감정을 드러내며 우는 일은 약한 모습으로 비친다. 이런 사회적 시선이 슬픔을 삼키게 만든다. 또 슬픔을 느끼지만 그 슬픔의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해 그저 눌러두는 날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눌린 슬픈 감정은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은 채 고요히 썩어간다. 슬픔은 그 특성상 마주하고 발화하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깊어질 뿐이다.

그런 날,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밝고 경쾌한 음악을 찾기도 한다. 음악만큼 우리의 감정을 빠르게 장악하는 장르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기쁜 음악은 순간의 기분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신나는 리듬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거나 발걸음이 가벼워지면서, 잠시라도 일상의 무게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마음 깊은 곳까지 정화되고 치유 받으려면 때로는 기쁜 음악보다 오히려 슬픈 음악이 필요할 때가 많다.

때로는 눈물이 흘러야 마음이 조금씩 풀리듯, 슬픈 음악은 울음을 통해 우리를 치유한다. 슬픔을 덮어두거나 외면하지 않고 마주할 수 있게 도와준다. 슬픈 음악은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느낌을 담고 있어서,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 슬픔을 대신 안아준다. 그 음악을 들으면 우리도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울게 되고, 그렇게 울면서 마음이 조금씩 다시 살아난다. 우리가 슬픔을 반드시 직접 느끼지 않아도 치유가 이뤄진다는 점이 바로 이 슬픈 음악이 가진 힘이다. 내가 직접 느끼지 않은 누군가의 슬픔을 대신 체험하게 되는 순간, 내 안에 쌓여 있던 감정도 조금씩 해소된다. 그러니까 슬픈 음악은 우리를 대신해서 울어주는 것이다.

정호승 시인은 자신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슬픔의 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이런 구절들은 슬픔 역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감정임을 깊이 깨닫게 한다. 우리는 흔히 기쁨만이 우리를 위로하고 행복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시인은 슬픔 역시 아주 중요한 감정임을 강조한다. 오히려 슬픔은 우리를 다독이고 치유하는 또 다른 힘이며, 삶의 한 부분으로서 반드시 겪어야 할 감정임을 말한다. 기쁨이 순간순간 찾아와 반짝이듯 번쩍이는 빛이라면, 슬픔은 오랫동안 우리 마음에 머물며 그 빛을 받들어 주는 든든한 그림자와 같다.

그렇다면 어떤 음악이 우리를 대신해 울어줄 수 있을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8번, 비창 소나타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의 2악장을 듣고 있으면 마치 누군가가 내 슬픔 옆에 조용히 앉아주는 느낌이 든다. 음악은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흐느끼지도 않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잔잔한 선율 속에는 말로 표현되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친다.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아 막막한 순간, 이 음악은 다정하게 말을 건다. 그러다 보면 울지 않아도 슬픔이 조금은 덜해진다. 내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이 음악 덕분에 마음 한쪽이 조용히 정화된다.

베토벤의 ‘비창’ 소나타 2악장에서 조용히 슬픔을 대신 울어주는 음악을 만났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드라마틱한 ‘비창’도 있다. 바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다. 이 작품은 격렬하게 울부짖듯 고통을 토해낸다. 덕분에 듣는 사람도 자신의 슬픔을 마주하고, 때로는 마음속으로 크게 울기도 하며 조금씩 슬픔을 풀어나갈 용기를 얻는다. 슬픈 음악은 그렇게 직접 말하지 못하는 깊은 슬픔을 대신해 주고, 무거운 감정을 조금씩 덜어내도록 돕는다.

그러니 우리는 슬플 때 굳이 기쁜 음악만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 감정을 억누르고 덮어두기보다는, 슬픈 음악을 통해 숨겨진 마음속 깊은 아픔을 꺼내어 바라보고 마주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멜로디 속에서 우리도 울고, 또 울면서 조금씩 상처를 치유한다. 그렇게 슬픔이 가라앉고 나면,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무거움이 서서히 가벼워진다.

슬픈 음악은 그런 존재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의 깊은 슬픔을 대신 느끼고, 우리 대신 눈물을 흘려주는 존재다. 그러니 위로가 필요할 땐 슬픈 음악에 귀를 기울이자. 음악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테니까. ‘괜찮아요. 제가 대신 울어드릴게요.’

#허명현#클래식이 뭐라고#비창 소나타#비창 소나타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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