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 맹목적 변호의 끝은 몰락[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2일 22시 57분


이괄의 난 당시 조선 인조가 충남 공주시 공산성에 피란한 일을 새긴 공주 쌍수정 사적비. 국가유산청 제공
이괄의 난 당시 조선 인조가 충남 공주시 공산성에 피란한 일을 새긴 공주 쌍수정 사적비. 국가유산청 제공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인조반정의 핵심 인사였던 평안 병사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가 반역할 것이라는 의심을 하자 이에 반발해 진짜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며칠 전 조정에는 이괄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고변(告變)이 들어왔는데, 인조는 믿지 않았다. 고변이 황당하다 하여 고변한 사람들을 무고로 처형하라고까지 했는데, 정승 이귀가 극구 반대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이괄은 용맹한 장수이고 그의 휘하에는 날랜 병사와 칼솜씨가 빼어난 항왜(임진왜란 때 항복한 왜인들) 무리까지 있었다. 따라서 그가 정말 반란을 일으킨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정은 고심 끝에 이괄의 아들을 잡아 오기로 결정했다. 이괄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대단히 어리석은 결정이었다. 이괄은 자기 아들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의 목을 베어 버렸다.

“아들이 역적으로 잡혀가면 어찌 아비가 무사할 수 있겠는가!” 이괄은 1월 22일(음력)에 부하들을 소집하고 군사를 몰아 한양으로 진군했다. 이괄의 군사는 우수했지만 백성들의 반응은 싸늘했고, 이 반란은 불과 20여 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한양에서 이괄을 극구 변호한 사람이 있었다. 이괄 아들의 스승이자 5촌 조카인 사헌부 지평 김원량은 이괄에게 반란 혐의가 씌워졌을 때 광해군 잔당이 모함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이괄 아들 역시 올바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괄이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는 상황에서도 김원량은 술에 취한 채 조정에 나와 “숙부는 반역자가 아니다! 나를 보내주면 새끼줄 하나로 묶어서 데려오겠다!”고 떠들었다. 결국 옥에 갇히고 말았다.

김원량의 투옥에는 간신 김자점과의 원한도 한몫했다. 김원량은 김자점이 탐욕스럽다고 공격한 적이 있어 김자점은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김원량은 옥중에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베옷을 찢어 이괄이 무고하다는 혈서를 썼다. 하지만 피로 쓴 상소문은 인조에게 가지도 못했다.

김원량은 이괄을 맹목적으로 믿어 그의 역모를 믿지 못했다. 김자점은 그 점을 이용해 그가 역모에 관여했다고 덮어씌운 뒤 참수형에 처했다. 그는 비록 이괄을 변호하기는 했지만 역모에 직접 관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 죄가 반역자로 참수형을 받을 것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경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마구 발설한 결과, 정적의 손에 걸려 목숨을 잃고 가문까지 망가뜨린 것이었다. 그는 김자점이 역모로 몰락한 뒤에도 신분을 되찾지 못하다가 숙종 때가 돼서야 양반 신분을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12·3 비상계엄 사태로 세상이 떠들썩하다. 윤석열 대통령 측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관할권이 없는 서울서부지법에서 발부받은 체포영장과 구속영장은 불법”이라고 주장했고, 그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법원을 습격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는 법치주의에 대한 크나큰 부정이다. 그런데도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법 질서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이다. 근간을 뒤흔드는 이런 행동은 뻔한 사실을 부정한 김원량과 다를 바 없다. 차분하게 사법 질서에 따라 나오는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민주시민의 길이다.

#이괄#반란#인조반정#인조#이괄의 난#김원량#김자점#법치주의#사법 질서#민주시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