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유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바지유는 이타심도 강했다. 클로드 모네나 오귀스트 르누아르 같은 가난한 화가 친구들의 후원자를 자처했다. 26세 때 그린 ‘가족 모임(1867∼1868년·사진)’은 그가 얼마나 유복한 집안 출신인지를 보여준다. 맑은 여름날 오후, 부모님 집 야외 테라스에 가까운 친인척들이 모여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결혼식 단체 사진처럼 대다수는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다들 고급스럽게 잘 차려입었는데, 특히 두 여성이 입은 남색 점무늬가 박힌 하늘색 드레스는 당시 파리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던 패션이다. 바지유의 부모는 왼쪽 커다란 밤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다. 정면을 응시한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무뚝뚝하게 먼 데를 쳐다보고 있다. 의사가 되지 못한 아들이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화가는 가족의 일원으로 자신도 화면에 그려 넣었다. 맨 왼쪽에 있는 키 큰 이가 바지유다. 찬란한 빛의 포착, 밝은 색채, 일상적인 주제, 야외 제작 등 인상주의의 특징을 드러내는 이 그림은 1867년 파리 살롱전에 전시됐다. 비슷한 주제로 모네가 그린 ‘정원의 여인들’은 떨어졌는데 말이다. 바지유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심사위원들이 실수로 자신의 작품을 뽑았을 거라며 모네의 낙선작을 사주었다.
안타깝게도 바지유는 29세에 요절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 석 달 만에 전사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남긴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인상파 화가들과 함께 바지유의 이름을 기억한다는 거다. 만약 그가 의사가 되었다면,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