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표정[이은화의 미술시간]〈287〉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0월 4일 23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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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에도 표정이 있을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19세기 영국 화가 윌리엄 홀먼 헌트는 감정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그는 추상적인 양심의 모습을 시각화해 그린 ‘깨어나는 양심’(1853년·사진)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림은 빅토리아 시대 중산층 가정 실내에 있는 한 쌍의 남녀를 묘사하고 있다. 남자가 말실수라도 한 걸까? 여자는 남자 무릎에 앉았다가 벌떡 일어서고 있다. 언뜻 보면 다정한 부부가 잠깐 불화를 겪는 장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림 속 다양한 상징들은 이들의 불륜 관계를 드러낸다. 파란 정장 차림의 남자와 달리 여자는 속옷에 준하는 하얀 실내복 차림이다. 여자는 왼손에 반지를 세 개나 꼈지만 약지에 결혼반지는 없다. 그러니까 남자는 지금 숨겨 놓은 정부의 집을 방문한 것이다. 남자가 마련해 주었을 여자의 집은 피아노와 고급 가구로 호화롭게 장식돼 있지만 정리 정돈이 안 돼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피아노 끝에 걸려 있는 미완성된 태피스트리와 바닥에 뒹구는 실은 무책임함과 불성실함을 암시한다. 왼쪽 바닥에는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눈물이, 부질없는 눈물이’가 적힌 종이가 버려져 있다. 가 버린 날들의 회한을 노래한 시다. 뒤에 있는 거울은 여자가 창밖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려준다.

죽었던 양심은 무언가에 찔렸을 때 되살아난다. 여자의 양심을 깨운 건 찬란한 봄빛이다. 음침하고 어지러운 실내와 대비되는 밝은 빛을 보고 각성한 듯하다. 더 이상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이라도 했을까. 남자의 품을 박차고 일어선다. 그런데 여자의 표정이 참 애매하다. 원래는 상당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려졌지만, 그림을 산 고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화가에게 수정을 요구해 지금처럼 애매한 표정이 되었다.

어쩌면 양심의 진짜 표정도 이렇지 않을까. 기쁠 때도 괴로울 때도 부끄러울 때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아닌, 복합적이면서도 애매한 저 여자의 표정처럼 말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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