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상·하원을 거쳐 넘어온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3일 서명했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를 불과 이틀 앞두고서다. 그런데 만약 이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됐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세계적 신용평가회사인 S&P는 72년 역사에서 딱 한 차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조정한 적이 있다. 2011년 8월의 일이다. S&P는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최고등급인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낮췄다. 그 여파로 미국의 주요 주가지수가 하루 새 6% 이상 폭락하는 등 세계 증시 전체가 ‘검은 월요일’을 맞았다.
미국 정부의 디폴트는 신용등급이 하루아침에 ‘20단계 아래’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전 세계 경제가 여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대혼돈에 휩싸이게 됐을 것이다. 이런 대재앙의 문을 열어젖히려 한 것도 정치였고, 문을 닫은 것도 정치였다. 전자는 ‘대결과 극단의 정치’였고, 후자는 ‘타협과 중도의 정치’였다.
정부의 부채한도를 의회가 정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과 덴마크 두 나라뿐이다. 그나마 덴마크에서는 사문화한 조항이고, 미국에서도 2011년을 제외하고는 심각하게 논의된 전례가 없다. 그럴 필요가 없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부채한도’는 이 금액 안에서 정부가 마음대로 돈을 쓰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의회가 심사하고 승인한 예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빚을 낼 일이 있으면 그 한도 안에서 하라는 제도다. 이런 제도가 없어도 행정부가 의회의 통제권을 벗어날 일은 없다.
그런데도 부채한도가 ‘갈등의 핵’으로 떠오르게 된 것은 극단주의로 치닫는 미국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오바마 정부 시절이던 2010년 미국에서는 강한 보수 성향을 띤 티파티(Tea Party) 바람이 거셌고, 이는 그해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는 여소야대(與小野大)의 결과로 이어졌다. 티파티 세력이 2011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공세를 위해 정치적 무기로 들고나온 것이 ‘부채한도’다.
올해 상황도 그때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번에 부채한도를 놓고 벼랑 끝 공세를 편 정치세력은 ‘티파티’의 후신으로 극단주의 성향이 더 짙어진 ‘프리덤 코커스’ 그룹이다. 이들은 케빈 매카시 의원(공화당)이 하원의장으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투표를 14차례나 부결시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손에 넣었다. 의회 주요 위원회의 요직을 보장받은 것은 물론이고 의원 한 명만 동의(動議)해도 의장 사퇴를 표결에 부칠 수 있는 조항을 관철시켜 매카시 의장의 ‘목줄’을 틀어쥐었다.
이들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매카시 의장이 타협에 응하지 않도록 공개적이고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왔다. 매카시 의장은 강경 우파의 반발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미국 경제가 혼돈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합의안에 서명했다. 다행히 파국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공화당 의원은 매카시 의장 혼자가 아니었다. 하원에서만 149명의 공화당 중도파 의원들이 부채한도 유예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바이든 대통령이라고 해서 타협 외의 선택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각에서 나온 ‘재무부가 1조 달러(약 1310조 원)짜리 동전을 주조하는 것과 같은 해법’도 궁여지책이긴 하나 법적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타협에 대한 당내 강경파들의 반발도 거셌다. “우리는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와 협상하지 않는다. 왜 공화당이라는 경제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하는가”라고 외치는 민주당 의원도 있었다. 그럼에도 바이든 대통령은 타협을 선택했고 백악관 고위 참모들이 나서서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하도록 했다. 매카시 의장과 타협안을 도출한 이후에도 공화당 의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최대한 겸손한 모습을 보이는 ‘로키 전략’으로 일관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매카시 의장과 잠정 합의안에 사인한 뒤 기자들과 만나 “아무도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타협안”이라며 “그것이 통치에 따르는 책임”이라고 말했다. 평범하고 상식적이지만 지당한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다.
최근 국회를 거쳐 윤석열 대통령의 책상에 쌓이는 법안들은 ‘거부권 행사 대상’ 아니면 ‘여야 짬짬이 포퓰리즘’ 법안들뿐이다. 여야 모두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식으로 상식과 중도를 잃어버린 탓이다. ‘제로 성장’ ‘인구소멸’ ‘연금 파탄’으로 치닫는 대한민국의 발걸음을 돌려세울 협치 법안이 윤 대통령의 책상 위에 오를 날이 과연 올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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