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진영]얼굴 없는 기부천사, 누군지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30일 21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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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이맘때면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엔 ‘발신자 표시 제한’으로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이 있다. 올해는 “다솔어린이집 유치원 차 뒷바퀴에 상자를 두었다”고 했다. 직원들이 달려가 찾은 상자 안에는 지폐 뭉치와 동전까지 현금 7600만5580원, 그리고 편지가 들어 있었다. “등록금이 없어 꿈을 접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익명의 독지가는 2000년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이후 23년간 9억 원 가까이 기부했다. 전주에선 그를 ‘얼굴 없는 천사’로 부른다. 경남 창원에는 ‘얼굴 없는 산타’가 있다. 2017년부터 성탄절이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익명으로 성금을 보내온다. 올해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태원 참사 피해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약 6000만 원을 기탁했다. 지금까지 기부 총액은 5억4500여만 원.

▷쌀이나 라면으로 온정을 전하는 이도 있다. 16년째 직접 농사지은 햅쌀을 기부하는 경남 거창군 ‘마리면 천사’, 명절마다 쌀 과일 떡 같은 제수용품을 두고 가는 광주 광산구 ‘하남동 천사’가 그들이다. 서울 양천구 ‘신월3동 천사’는 새벽에 몰래 트럭을 몰고 와 주민센터에 쌀 500kg, 라면 50박스, 귤 50박스를 내려놓는 모습이 폐쇄회로(CC)TV에 잡혔다. “이곳에서 할머니와 지독한 가난에 빠져 살았습니다. 지금은 작게나마 도울 수 있어서 가슴 따뜻합니다.”

▷고마운 독지가의 얼굴을 기어이 알아낼 때도 있다. 매년 쌀을 보내오는 울산 중구 복산2동 천사는 주민센터가 쌀을 가져온 배달업체에 수소문해 신원이 밝혀졌다. 서울 신월동 천사는 2011년 명동 자선냄비에 1억1000만 원짜리 수표를, 이듬해엔 같은 냄비에 1억570만 원짜리 수표를 넣었다. 자선냄비본부는 수표와 함께 건넨 편지의 필적을 감정해 두 사람이 동일인임을 확인했고 결국 그의 정체가 공개됐다. “폐지 줍는 어르신들 보면 지독히 가난했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못다 한 효도 대신 기부를….”

▷충남 천안시 청룡동 천사는 “내가 누군지 알려고 하면 다시 들고 가겠다”며 지난 28일 현금 9900만 원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기부천사들이 한사코 선행을 숨기는 이유는 ‘받는 이들에게 부담될까 봐’ ‘누군지 모르면 감동이 오래 유지되므로’ ‘기부 사실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주는 게 싫어서’라고 한다. 기부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내 통장에 입금할 때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와 같다. 그러니 감사한 마음에 얼굴 없는 천사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 말자. 인간은 받는 기쁨보다 주는 행복이 더 크다는 걸 아는 존재다.


이진영 논설위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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