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특이점[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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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추운 겨울 새벽 출근길. 살짝 열린 연구실 문틈 사이로 책상에 앉아 있는 대학원생의 모습이 보인다. 밤을 새운 것일까? 꼼짝도 하지 않고 책을 보고 있다. 끝없는 공부. 저 학생은 자신이 끝 모를 공부의 시작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까? 앞으로 거쳐야 할 수많은 고비, 가는 길마다 지키고 서 있을 현실이라는 벽, 막다른 골목처럼 느껴지는 순간들….

흔히들 공부는 배우는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내 생각엔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다. 알고 싶은 열정, 알고 난 후에 보이는 지평선, 그리고 다시 저 먼 지평선을 향해 걸어 나가는 것, 그것의 반복이 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스승이라는 존재는 단지 조력자일 뿐이다.

나는 대학원생이 되어서야 공부의 즐거움을 알았다. 그 후엔 “그만 놀고 공부해”라는 소리보다 “건강 생각해서 적당히 해!”라는 소리를 더 자주 들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열정이다. 말릴 수 없는 의지. 이 열정은 현실이라는 창에 부러지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현실을 이길 힘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아침이 올 때까지 연구실 책상에 앉아 공부의 즐거움을 느낀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이 사라지고 우주의 끝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이었다. 엄격했다. 끊임없이 먹고사는 문제가 책상을 걷어찼다. 내가 현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시간강사였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시간강사가 되어 세 군데의 대학을 오고 갔다. 지방에 있는 대학 두 곳, 서울에 있는 대학 한 곳. 지방에 갈 때는, 새벽에 나가 오전에 수업하고 점심을 간단히 먹고 오후 수업을 몇 개 마치고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에 오면 한밤중이 되었다.

많은 친구들이 취직하고 결혼하고 사회생활을 넓혀 갈 때, 작은 책상에 앉아 공부한다는 것은, 옆에서 보기에, 불확실한 미래에 인생을 거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사자인 내겐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내 미래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특이점처럼.

특이점은 물리학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반 상대성 이론을 이용해 중력의 특이점을 찾아내면 어느 부근에서 중력장이 무한대인 시공간 영역이 열린다. 엄청난 중력 때문에 시공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사라지는 점이다. 참고로 특이점 이론을 만든 물리학자는 2020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과학자 로저 펜로즈다. 그는 특이점 정리를 증명했으며, 이를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에 적용하여 특이점인 블랙홀의 성질을 밝혀냈다.

돌이켜 보니, 불확실한 미래와 현실에 막막했지만, 미친 듯이 몰두했던 그때가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인생의 가장 추운 시기였지만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가장 불확실한 시기였지만 가장 확실했던 시절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반 물리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마치 인생의 특이점처럼. 이토록 삶에는 역설이 가득하다. 새벽, 작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학생에게 용기를 전한다. 그런 시기는 어느 누구에게나 있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특이점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인생#특이점#물리학#중요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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