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와 블랙홀[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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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학기 말이 다가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학기말 시험을 치러야 하고, 석·박사 과정의 학생들은 졸업논문을 발표해야 한다. 항상 그렇듯 한 학기를 마무리할 때면 “아 벌써”라는 말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

위층 생명과학과 이 교수의 박사과정 학생이 이번 학기에 졸업한다. 박사 학위를 받고 곧 독일로 떠날 예정이다. 이 교수는 항상 말로는 “빨리 졸업을 시켜버려야지!”라고 했지만 자식 같은, 아마도 자식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학생을 떠나보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다.

석·박사 과정 6년의 세월, 작은 실험실에서 얼마나 많은 추억과 기억이 쌓였을까? 2년 동안 정성 들인 개구리 실험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어 화장실에서 울기도 했을 것이고, 연구비를 받지 못해 보릿고개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을 것이다. 까다로운 이 교수의 잔소리를 얼마나 많은 시간 동안 침묵으로 견뎌냈을까? 지금의 순간은 그런 무수한 인내의 시간, 그리고 노력 끝에 얻은 과학의 짜릿한 성취감이 있어 가능했을 것이다.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낸 이론물리학자 중에 존 휠러가 있다. 아인슈타인이 교수로 있던 프린스턴대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제자를 길러내지 않았던 아인슈타인과는 달리 46명의 박사를 지도했다. 그의 제자로는 양자전기역학을 연구한 리처드 파인먼과 중력파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입증한 킵 손이 있다. 둘 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이 외에 현재 대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론물리학자들 상당수가 그의 제자다.

그는 젊은 시절 현대 물리학의 두 거목인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와 함께 연구하며 그들이 개척한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발전시켰다. 보어와 함께 핵분열 이론을 만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우주의 검은 구멍이라는 ‘블랙홀’이라는 대중적 이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리학계가 별의 붕괴에 주목하도록 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이 블랙홀이라는 단어는 이후 대중적 관심을 끌어내는 상징적 물리학 용어가 되었다. 그는 다양한 비유를 들어 물리학을 명쾌하게 설명함으로써 ‘시인을 위한 물리학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그가 만들어낸 또 다른 블랙홀 이론 중에 무모 정리(no-hair theorem), 직역하면 털 없음 정리가 있다. 털이 없는 이론이라고 해서 대머리 정리로 불리기도 한다. 블랙홀이 질량, 전하, 각운동량으로 이루어졌다고 정의한 이론에 대해 흥미를 유도하기 위해 그는 유머스럽게 대머리 정리라고 이름 지었다. 유머가 담긴 그의 이론은 친근한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 블랙홀의 대머리 정리를 연구하는 옆방 이론물리학자 김 교수가 최근 중력 입자 하나가 대머리에 덧붙여져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고 있다. 지금은 머리카락이 3개인데 하나의 머리카락이 덧붙여진다는 의미인데…. 김 교수의 이론이 완성된다면 어떤 이름이 될까 궁금하다. 어려운 과학이지만 이런 숨통 틔는 유머와 웃음이 있어 세상이 풍성해지고 여유로워지는지 모른다.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대머리#블랙홀#유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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