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마을박물관에 고하는 작별인사[김창일의 갯마을 탐구]〈75〉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3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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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과거 명태잡이 어업과 돌미역 채취로 부유했으나 지금은 시곗바늘이 수십 년 전에 멈춘 듯 쇠락한 어촌. 그러나 좁다란 골목길만큼 이웃 간 거리가 가까운 마을이 있다. 한파가 몰아치던 2013년 겨울, 어촌 문화를 조사하기 위해 삼척으로 갔다. 곧바로 빈집을 구해서 늦가을까지 마을에 거주하며 주민들과 동고동락했다. 마을 회의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어선을 타고 물고기잡이에 동행하거나 농사를 도우며 생활했다. 물론 봉사활동을 위해 마을 주민이 된 건 아니다. 참여 관찰을 하며 어촌 생활상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아픈 노인을 승용차에 태워서 병원으로 모셔가고 어촌계 행사에 참여하는 등 지역사회의 일원이 됐다. 외부인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고 신뢰 관계가 형성되면서 주민들은 꾸밈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게 9개월을 갈남마을에서 생활하며 두 권의 어촌 민속지를 발간했다. 이후 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폐허가 된 건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기로 했다. 삼척 최초로 가리비 종패를 양식하던 낡은 창고 건물에 생업자료와 마을 역사, 전설 등을 보여주는 전시관을 꾸미기로 한 것이다. 주민들은 가족사가 고스란히 담긴 사진이나 물건을 자료로 내놓았다. 조사한 내용과 수집한 자료를 채워 넣자 마을 이야기를 진솔하게 증언하는 기억의 창고로 변모했다. 10여 평의 작은 공간에 담긴 어촌민의 평범한 생활상이 특별함으로 빛났다. 대도시 박물관과 달리 규모가 작고, 전시품도 적지만 바닷가 사람들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는 진정한 마을박물관으로 탄생했다.

소박하게 만든 박물관을 석 달만 운영하고 닫는다는 게 국립민속박물관 계획이었으나 주민들은 전시를 이어가기를 원했다. 지원을 약속할 수 없음에도 자체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해설사는 마을박물관 앞 공터에서 틈틈이 공연, 마을극장 등 다양한 문화행사를 열었고 해설을 원하는 방문객이 있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갔다. 건물과 전시자료를 기꺼이 제공하고, 열정적인 해설을 마다하지 않는 주민 참여가 있었기에 마을박물관은 지속될 수 있었다.

현재의 기록 없이 미래의 역사를 논하는 일은 공허하다.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 양상을 기록하는 일은 현재를 증언하는 미래의 역사가 된다. 평범한 삶을 기록하는 일은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래서 그럭저럭 별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는 주민들에게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전시 기획을 한 것이다.

얼마 전 삼척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마을박물관으로 활용하도록 공간을 내어준 주민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건물을 팔고 이사하게 됐단다. 삼척갈남마을박물관은 그동안 주민들에게 기억의 저장소로, 방문객에게는 이해와 공감의 공간이 됐으나 이제 역할을 다했다. “누구든 떠나갈 때는/날이 흐린 날을 피해서 가자 (중략) 지는 해 노을 속에/잊을 수 없는 것들을 잊으며 가자”(류시화 ‘누구든 떠나갈 때는’)라는 시구처럼 잊을 수 없는 것과 작별하기 위해 나는 삼척으로 향한다. 출발하기 전 고마운 마음을 칼럼에 담아 보낸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삼척#마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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