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정은]편견 깨고 공연계 판도 바꾼 노배우들의 빛나는 활약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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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연극 ‘헤다 가블러’의 주인공이던 배우 이혜영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헤다 가블러’는 그가 13년 만에 선택한 무대 복귀작이었다. 당시 50세였던 그는 “옛날처럼 멜로 연기를 하고 싶은데, 들어오는 작품마다 엄마 역할뿐이었다. 더 이상 할 엄마 역도 없다”고 고백했다. 그가 연극에 복귀하게 된 데에는 50대 여배우임에도 20대 당찬 여성 헤다 가블러 역을 제안받은 게 컸다. 이어진 그의 자조적인 농담은 슬프면서도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젊은 사람들에게 나는 배우 이혜영이 아니라 어느 순간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엄마로 더 유명하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연극 뮤지컬 등 공연시장에서 주인공은 소위 ‘티켓파워’를 지닌 20, 30대 젊은 배우들의 몫이었다. 캐릭터가 70대 노인이어도 젊은 배우들이 분장을 하고 ‘늙음’을 연기했다. 제작자 입장에선 수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공연이 망하지 않고 수익을 내려면 티켓을 안정적으로 팔 수 있는 젊은 스타 배우가 필요했다. 그럴수록 중년 및 노배우들이 설 자리는 비중 작은 조연에 불과했다. 주인공을 둘러싼 세대 쏠림이 유독 심하던 시기였다.

그런 무대 위 판도가 10년 만에 바뀌었다. 요즘 공연계에선 일흔여덟의 노배우가 주인공을 꿰차 공연 회차별로 전석을 매진시키는 ‘노배우 열풍’이 일고 있다.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으로 한국 배우 최초로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거머쥔 오영수 이야기다. 그가 ‘오징어게임’으로 명성을 얻은 직후 선택한 작품은 2인극 ‘라스트 세션’. 오영수는 서른 살가량 어린 후배 배우 전박찬, 이상윤과 90분간 빈틈없는 논쟁을 벌이며 열연한다. 지난달 골든글로브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그가 출연하는 공연은 전석 매진됐다. 코로나19로 얼어붙은 연극시장에 모처럼 분 훈풍이었다.

58년간 연기 내공을 다진 오영수지만, ‘오징어게임’ 이전 그는 주연보다는 조연 배우에 가까웠다. ‘오징어게임’ 같은 히트작이 없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그의 연기 내공과는 무관하게 작품 속 주인공들은 젊은 캐릭터 위주였고, 자연스럽게 젊은 후배들에게 기회가 갈 수밖에 없었다. 주어지는 역할도 한정적이었다. 그가 주인공을 맡았던 작품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고, 그중 연극 ‘3월의 눈’ 역시 죽음을 앞둔 노인 역이었다.

하지만 10년 뒤 발휘된 노배우의 ‘구력’은 다른 동료 노배우들의 활약에도 불을 지피고 있다. 공연계에선 대형 제작사가 무대에서 잔뼈가 굵어진 노배우 위주로 캐스팅한 연극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작품을 언론에 홍보할 때 과거와 달리 노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한다. 한창 공연 중인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선 팔순의 배우 박정자, 연극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에선 예순셋의 배우 남명렬이 주인공으로 활약 중이다. 젊은 배우들이 독식하던 무대에서 노배우들의 빛나는 활약이 반갑다. 누군가는 거쳤고 누군가는 거칠 젊음과 늙음만으로 활약을 제한하기엔, 관객들이 맛볼 노배우의 내공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김정은 문화부 차장 kimje@donga.com



#편견#공연계#판도#노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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