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총칼 대신 휘두르는 인사권, 입법권

이기홍 대기자 입력 2021-02-19 03:00수정 2021-02-19 04:32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미국 대법원이 뉴딜 정책 관련 법률에 잇따라 위헌 판정을 내리자 루스벨트 대통령이 심판을 바꾸려한다고 풍자한 신문 만평. “당신들 결정이 마음에 안든다”며 주심을 겁박하고 있다. 오른쪽 만평은 루스벨트가 공공근로사업청(PWA) 장관에게 대법원 개혁을 위한 뉴딜 예산을 요청한다는 풍자다. 컬럼버스 디스패치 1937년 2월· FDR도서관
이기홍 대기자
초유의 일들이 이어진다. 조국과 추미애의 위선·독선 퍼레이드에 이어 대법원장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사례를 추가했다. 건국 이래 대법원장의 권위와 신뢰가 지금처럼 바닥에 떨어진 때는 없었다.

인사권자의 선구안 부족, 검증 부족 차원만으로는 왜 유독 이 정부 들어 이런 일이 잇따르는지 다 설명할 수 없다.

본질적 원인은 집권세력이 인사권을 권력 영속화를 위한 수단으로 악용한 데서 찾아야 한다.

권력 도구로서의 활용 가능성을 척도로 발탁하고, 그렇게 발탁된 이들은 충실한 조직책이 되어 견마지로(犬馬之勞) 하는 악순환 고리의 부작용이 종기처럼 곳곳에서 곪아 터지는 현상이다.

주요기사
물론 내 편 발탁은 어느 정권이나 있었다. 대법원장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인사를 통한 재판 개입 징후다.

정권에 불리한 판결을 한 재판부는 전보시키고, 우호적이라 여겨지는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잔류시킨다. 정권의 역린을 건드린 사건들을 잠재적 우리 편으로 여겨지는 판사에게 맡기려는 의도로 의심받는 최근 법원 인사는, 해당 판사들이 실제로 정권에 우호적 판결을 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여부와는 완전히 별개로, 그런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는 인사를 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법부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10년 전 한 판사가 펴낸 ‘미국 법원을 말하다-한국판사가 본 워싱턴 법조계 이야기’(강한승 저)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책에서 2명의 미국 소장파 판사를 언급하면서 훗날 대법관 재목이라고 소개했다. 실제로 각각 5년, 7년 뒤 두 판사는 오바마와 트럼프에 의해 대법관에 지명됐다.

책의 저자가 예지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아무리 인사권을 남용해온 트럼프조차도 대법관은 그 진영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받아온 사람을 지명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보수든 진보든 실력과 안정감을 지녔다는 평판을 받는 인물이 장차의 대법관 재목으로 거론되며 성장한다.

한 사회의 이념 스펙트럼을 좌 1, 우 10으로 놓고 볼 때 4~6 사이 인물이 아니면 엄두도 내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는 주요 공직에 1, 2 또는 9, 10의 인물들이 대거 발탁된다. 진보진영 내에서조차 대법원장감으로 거론조차 안 됐던 지방법원장이 단번에 발탁 되고, 대법관과 헌법재판관 자리가 특정 성향의 이너서클 출신으로 채워진다.

물론 자기편인줄 알고 발탁한 인물이 직업적 소명을 지키며 통치자에 거역하는 사례는 동서고금 어디서든 있다.

예기치 않은 ‘심판의 반란’에 직면했을 때 제3세계 독재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경기 규칙, 종목의 본질 자체를 바꿔버리는 입법이다.

20세기 독재자가 탱크와 총칼을 동원했다면, 21세기엔 인사권과 입법권을 무기로 휘두르는 것이다. 현금 살포로 다수당을 차지한 뒤, 나팔수들을 총동원해 입법을 정당화시키는 허위 논리를 확산시킨다.

하필 더불어민주당이 추미애의 검찰장악이 실패하자마자 검찰의 수사권을 아예 없애겠다고 나선 것은 문재인 정권이 제3세계 권력자들의 패턴을 따라 한다는 오해를 자초하기 십상이다.

친문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서 검찰은 기소 업무만을 담당한다고 강조한다. 물론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미국에서도 검찰이 대형 비리를 파헤치는 경우가 숱하다. 지난해 트럼프의 책사 스티브 배넌을 기소한 것도 금융 범죄 수사와 정·재계 거물 수사로 명성을 쌓아온 뉴욕남부 연방지방검찰청(SDNY)이었다. 아베 전 총리의 벚꽃스캔들을 파헤치는 주체도 도쿄지검이다.

경찰은 말할 것도 없고 헌법과 법률로 신분이 보장돼 있는 검사도 산 권력 수사를 덮고 정권에 빌붙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예 검찰의 권력비리 수사 기능마저 없애버리면 집권세력은 절대왕조 보다 더 마음 놓고 권력을 향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령 대선에 져도 꽁꽁 숨긴 정권 치부를 파헤칠 만한 수사력을 가진 조직이 없으니 걱정을 덜 수 있다.

어느 통치자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욕심이 있게 마련이다. 미국인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 중 한명인 프랭클린 루스벨트(FDR) 마저도 뉴딜 정책 관련 법률들이 잇따라 대법원에서 위헌 판결을 받자 대법원 구조개혁 입법을 시도했다. 당시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상대 후보를 거의 더블스코어로 누르고 재선된 직후였다.

하지만 압도적 다수당이던 여당(민주당)마저 미국의 장래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고, 루스벨트는 물러섰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는 통치자가 욕구를 절제하고 제도의 취지를 존중하느냐 여부다.

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한 요소일 뿐이다. 히틀러 무솔리니 등 독재자들도 다수결이란 형식은 거쳤다. 소수의견 배려와 절차의 존중 없인 민주주의가 존립할 수 없다. 국회 상임위 절차도, 검찰인사의 총장 의견 청취도, 인사청문회도 그저 법조문에 활자화된 내용만 겉치레로 거치고 그 조항에 담긴 근본 취지와 전통은 다 무시하는 건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리는 행위다.

인사권을 휘둘러 선수를 쫓아내고 심판 구성을 유리하게 하고, 권력 수사 기능을 완전히 말살시켜도, 헌법에 관련된 명문 조항이 없으니 위헌이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헌법은 활자화된 문구 그 이상의 정신이다. 인사농단과 입법폭주는 국민 상식의 법정에서는 모두 위헌이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



#총칼#인사권#입법권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