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섬, 연도에 여인들이 살았다[김창일의 갯마을 탐구]〈43〉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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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섬에는 여자들만 남았다. 남자들은 고기 떼를 찾아 흑산도, 연평도 등지로 떠나고 없다. 남자들이 섬을 비웠을 때 상(喪)이 나면, 남아있는 여성들이 장례를 치러야 했다. 작은 생활터전이 묘지로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맞은편에서 400m 떨어진 무인도를 공동묘지로 사용했다. 여자들은 상여를 배에 싣고 무인도로 향하며 노래와 놀이로 전송했다. 도착하면 다시 상여를 메고 산으로 올라가서 매장했다. 바위가 많은 솔섬은 흙이 부족했다. 봉분을 만들기 위해 사방으로 흩어져서 흙과 잔디를 모았다. 그러고 나면 “쾌지나 칭칭 나네” 등을 부르며 다시 신명난 놀이를 이어갔다. 이는 슬픔에 젖어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고 상여꾼들의 피로를 풀기 위함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연도(椽島)로 되돌아오는 뱃길에서도 놀이는 계속된다. 아낙네들은 춤과 노래, 걸쭉한 육담으로 웃음판을 만들어 상주가 잠시나마 슬픔을 잊도록 했다. 창원 진해의 연도라는 작은 섬에 살던 여성들 이야기다.

연도 여성들의 장례의식은 진도의 다시래기를 연상시킨다.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연극판인데 상주까지 웃게 만든다. 연극은 산모가 아이를 낳는 장면으로 끝맺는다. 이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으로써 소멸의 흔적을 지우고, 삶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라는 혼돈에서 코스모스로의 전환, 즉 잃어버린 조화를 되찾는 것이다. 춤과 놀이로 저승길을 전송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존재했던 죽음에의 대응 방식이었다. 수서(隋書) 동이전 고려(고구려)조에 “고구려인들은 장례할 때 북을 두드리고 춤추며 노래 부르면서 보냈다”고 하니 그 연원은 오래됐다.

진해의 연도 장례놀이는 상주가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돕는다. 죽음은 산자가 극복해야 할 일이기에 놀이와 웃음으로써 이웃을 위로한 것이다. 연도 여성들의 공동체적 삶을 지속시키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진해에 유배를 갔다가 우리나라 최초의 어보(魚譜)를 집필한 김려(金(려,여)·1766∼1821)는 그가 목격한 섬 여인들의 강인함을 우산잡곡(牛山雜曲)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다. “튼실한 아낙 호랑이처럼 억세서, 머리에 수건 쓰고 두멍에 정어리를 담고 있네”라고 했다. 또한 “섬 마을 각시들 남자처럼 튼튼해서 엉덩이 크고 허리 넓어 유행에 어둡다”거나 “어촌 아낙은 배도 잘 부려서, 키를 돌려 뱃머리 열자 제비처럼 날아간다”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며 지켜온 연도와 공동묘지로 이용되던 솔섬은 신항만 건설로 육지와 연결됐다. 주변 바다는 매립되었고 컨테이너 선박이 접안하는 항만의 일부가 됐다. 연도의 아낙네들이 솔섬으로 운구하던 소형목선을 대신해 초대형선박이 컨테이너를 실어 나르고 있다. 신항만이 완공되면 물동량 기준 세계 3위 컨테이너항이 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한다. 필자는 가덕도 끄트머리에서 신항의 웅장한 모습을 마주하며 호랑이처럼 억세고, 남자처럼 튼튼하며, 제비처럼 날아가듯이 노를 젓던 여성들을 떠올렸다. 그 땅에는 작은 섬이 있었고, 물고기 잡이를 떠난 남편, 아비, 아들을 기다리며 섬을 지키던 강인한 여인들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려 한다. 또한 여기에 기록하여 남긴다. 많은 사람들이 그 섬에 살던 여성들을 기억하기를 바라며.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연도#장례의식#김려#우산잡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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