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이기홍]朴의 변명은 文의 반면교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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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논설위원
이기홍 논설위원
1심 판결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왜 억울해할까? 재판기록 등을 토대로 그 심리를 유추해보자.

우선 블랙리스트 유죄에 어떤 생각일까? “나에게 표를 준 51.6% 국민의 바람은 기울어진 이념 운동장을 바로잡아 달라는 것이었다. 특히 문화예술계는 좌편향이 심하다. 우리 역사와 사회구조를 착취와 억압, 미국의 식민지처럼 묘사하는 이른바 민중예술인들에게까지 국민 세금을 지원하는 게 옳은 일일까. 자기들이 그런 창작을 하고 싶으면 하라고 해라. 하지만 왜 국고 지원까지 해줘야 하나.

나는 그런 생각으로 이념 편향적 영화 등에 대한 지원은 문제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몇 단계 내려가면서 분류표가 만들어지고 1만 명 규모로 커졌다. 공무원들이 편의적 발상으로 획일적 리스트를 만든 거다.”

뇌물죄? “나는 혈혈단신이고 재산도 80억 원이나 있다. 실제로 내가 한 푼이라도 챙긴 게 있나? 수년전 한류·스포츠·문화 진흥이 얼마나 중차대한 국가적 과제로 여겨졌나. 지속적으로 진흥하기 위해 재단을 만들었는데, 청와대가 움직이지 않으면 기업들이 기금을 내겠는가.”

최순실? “최에게 연설문을 보내고 국정을 상의한 것은 잘못이지만, 만약 최순실을 비서관이나 특보로 임명했다면 별문제 안됐을 사안 아닌가. 그런데 만약 내가 취임하면서 최순실을 관직에 임명했다면 언론, 야당이 가만있었을까. ‘최태민의 딸’임을 강조하면서 황색 루머까지 동원하며 정권을 흔들지 않았을까.”

감방 속 박 전대통령은 이런 생각의 울타리를 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핵심은 나에겐 범의(犯意), 악의(惡意)가 없었다는 확신일 것이다. 최순실의 숱한 악행은 몰랐으니 도의적 책임만 있다 여길 것이다. 그래서 평생 억울해하며 실제 허물보다 수백배 과중하게 처벌받는 정치적 제물이 됐다고 여길 것이다.

그게 대의민주주의를 위해 고민하거나 싸워본 적도,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옛 시대 정치인의 한계다. 백번 양보해 설령 범죄 의도가 없었다 해도, 권력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으며 법적 절차에 근거해 결정·집행하고, 남용되지 않게 점검해야 하는게 민주주의, 법치주의 공화국의 원칙인데, 그걸 체화하지 못한 채 권좌에 올랐다.

조직에서 일하면서 권한과 책임이 단계적으로 커지고, 팀원들을 이끌며 부대끼고 상호비판도 해가며 뭔가를 만들어낸 경험도 없었던 외톨이의 비극이다. 그러니 최순실의 사익(私益)인 승마, 광고회사 지원 등을 위해 기업을 비트는 명백한 위법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승마 유망주 지원’ ‘창조경제에 모범이 될 중소업체 지원’을 위해 대통령이 이 정도 힘도 못 써주나라고 생각했을 테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지 자문을 구할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일정한 권한을 갖게 된 자가 모든 걸 원하는 대로 이루려고 밀어붙이면, 필연적으로 어딘가에서 탈이 난다. 문재인 정권도 역사 경제 교육 사회 복지 등 모든 걸 반드시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이뤄야한다는 강박증을 보인다.

대통령이 선의로 설정한 목표가 일선 공무원들에겐 생사가 걸린 지상명령이 되고, 이 기회에 한 상(床) 차려 올리려는 공무원들까지 극성을 부리게 마련이다. 검찰은 혐의가 아니라 사람을 겨냥해 탈탈 털어 어떻게하든 잡아넣는 무한충성을 하고, 경제부처들은 연신 나라금고를 열어 정권이 국민들에게 베풀 선물꾸러미를 채워 넣는다. 그 과정에서 여러 명이 직권남용의 금을 밟고 있을지 모른다.

과거처럼 시위대 학살 명령을 내리고, 뇌물을 해외로 빼돌리는 것 같은 사악함과 탐욕이 없었다해도, 설령 나름 선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것이라 해도 권력 행사 과정에서 헌법과 민주주의 원칙을 조금이라도 훼손하면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는 시대가 됐다. 대통령이 쥔 칼은 그렇게 예리한 양날의, 손잡이 없는 칼이다. 자신이 굴리는 조막만한 눈 뭉치가 어딘가에서 눈사태를 일으킬 수 있음을 박근혜는 물론 문재인 청와대도 자꾸 잊는 것 같다.

이기홍 논설위원 sechepa@donga.com


#박근혜#뇌물죄#최순실#악의#대의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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