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수사는 일반 수사와 많이 다르다. 수사의 성패는 증거에 달렸는데 피해자가 유일한 증거다. 이마저 물증이 아니다. 진술이 전부다. 둘 사이 일이라 목격자도 없다. 사건 현장은 생활 현장이다. 증거를 찾으려 들쑤시기 어렵다. 가해자도 이런 사정을 안다. “만취해 기억이 안 난다” “합의한 관계였다”는 말을 단골로 한다. 뻔뻔함에 화가 치밀다가도 구멍이 숭숭 뚫린 증거 앞에서 수사관은 난감하다. 그렇다고 피해자를 닦달하듯 조사하다간 ‘2차 가해자’가 된다.
성범죄 수사는 뇌를 다루는 신경외과 수술과 비슷하다. 섬세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환자가 뇌사에 빠지거나 반신불수가 될 수 있다. 마저 비교하자면, 정공법을 구사하는 강도·살인 수사는 일반외과 수술에 가깝다. 연쇄살인범 추적은 재범 우려 때문에 시간이 생명이다. 중증외상 응급수술과 닮았다. 사기, 횡령 등 재산범죄 수사는 성형외과 수술에 비견할 만하다. 가해자 처벌 못지않게 합의를 시켜서라도 피해자를 만족시키는 게 중요하다. 거악을 파헤치는 ‘특별수사’는 외압에 굴하지 않는 저돌성과 치밀함이 요구된다. 심장을 열어보는 흉부외과 의사에게 특히 필요한 덕목이다.
수술법이 제각각이듯 범죄마다 수사기법도 달라야 한다. 성범죄를 수사하면서 강력사건 처리하듯 서슴없이 대질조사를 하거나, 경제사건에서처럼 합의를 유도하면 거의 실패한다.
경찰이 최근 재수사에 나선 2004년 ‘단역배우 자매 자살 사건’은 실패한 수사의 참혹함을 보여준다. 당시 경찰은 단역배우였던 피해자를 가해자들과 나란히 앉혀놓고 여러 번 대질조사를 했다. 그 자리에서 한 가해자는 피해자와의 성행위 자세를 흉내 냈다. “경찰이 딸에게 가해자의 성기를 그려보라고 A4용지까지 건넸다”고 자매 어머니는 증언한다. 피해자가 2차 피해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자 단역 일을 소개해준 여동생이 뒤따랐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가해자가 “잘못했다고 빌게요”라고 하면 경찰이 피해자 연락처를 건네며 합의를 거드는 일도 있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요즘 성범죄 수사에 고유한 기법이 도입된 것은 당시 피해자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은 경찰 수사 때부터 피해자에게 국선변호인을 붙여준다. 진술분석 전문가도 동원된다. 신변 불안을 호소하면 경찰이 피해자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한다. 예전에는 “피해자 진술밖에 없다”며 증거 불충분으로 끝내던 것을 이제는 피해자 진술의 증거능력을 높이려 노력한다.
단원 17명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는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감독이 구속되기까지 경찰은 이런 수사기법을 총동원했다. 그는 경찰이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을 들이밀자 반박을 못 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고 한다. “(피해자가) 그렇게까지 말했다면 그게 사실일 것”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 이후 수사기관은 다시 시험대에 섰다. 폭로에 나섰던 피해자들 대부분이 수사의 문턱에서 주저한다.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는 반응이다. 영화감독 김기덕 씨와 배우 조재현 씨 수사가 답보 상태인 이유다. 9년 만에 검찰의 재조사 대상으로 떠오른 배우 장자연 씨 성접대 의혹 수사는 더욱 ‘난코스’다. 장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피맺힌 한을 남겼지만 정작 ‘살아있는 증거’는 남아 있지 않다. ‘미투’는 수사기관에 새로운 ‘수술법’을 찾으라는 숙제를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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