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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오피니언

[이승우의 프로방스를 걷다]발 있는 자는 걸어라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입력 2018-01-30 03:00업데이트 2018-02-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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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권기령 기자 beanoil@donga.com
《탄탄한 문장과 깊은 사유의 작가 이승우. 그는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탄다면 유력 후보로 거론되며 프랑스에서 사랑받는 작가다. 프랑스 현지에서 그가 보내오는 사색의 흔적들을 정기 연재한다.》
 

‘우리들의 발에는 뿌리가 없다.’

‘걷기 예찬’의 작가 다비드 르 브르통이 한 말이다. ‘사람은 왜 걷는가’라고 물을 때 내놓을 수 있는 답으로 이것만 한 것이 없다. 사람은 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 발에 뿌리가 없으니 한 자리에 고정되지 않는다는 것, 고정될 수 없다는 것.

2018년 1년 동안 몸담고 있는 직장의 배려로 연구년을 얻어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에서 살기로 했다. 물과 공기와 길과 사람과 말이 낯선 곳이다. 그곳에서 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두 가지다. 걷는다. 그리고 쓴다. 걷고 쓰는 것은 이제껏 내가 해온 일이다. 그러니까 다른 계획은 세우지 않은 셈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하던 일을 계속 하겠다는 것, 더 많이 더 잘 해보겠다는 것을 계획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눈이 보는 일을 하는 것처럼 발은 걷는 일을 한다. 보기 위해 눈이 필요한 것처럼 걷기 위해 발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발이 걷는 데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필요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존재가 부여한 활동에 초점을 맞춰 서술하면 내용이 달라진다. ‘걷기 위해 발이 필요하다’와 ‘발이 있어서 걷는다’는 같은 문장이 아니다.

필요에 의해 도구들이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도구들은 그 도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필요를 위해 쓰인다. 필요가 도구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도구가 필요를 발명해낸 예는 의외로 흔하다. 실은 기술 문명이 만든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다. 가령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휴대전화의 여러 기능 가운데 많은 것이 제조사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홍보되기 전에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매개된 것,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진 것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사용하는 많은 것, 없으면 불편하고 심지어 불행하다고 느끼는 많은 것이 실은 우리의 필요와 상관없이 만들어졌다. 필요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것들은, 그러나 만들어진 다음에는 필요와 뗄 수 없는 것이 된다.

인간과 달리 신은 모방할 타자가 없으므로 신의 욕망은 누군가에 의해 부추겨지거나 매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는 존재가 먼저고 활동이 다음이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신이 먼저 있고, 있는 신이 활동(창조)한다. 이 문장을 천지의 창조를 위해 신이 필요했다고 읽는 것은 오독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있고(창조되고), 있는 신이 정원을 다스린다. 정원 관리를 위해 인간이 있다(창조되었다)고 읽는 것은 앞과 뒤를 뒤집은 것이다. 인간은 어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도구적 존재가 아니다.

발이 있어서 걷는다. 눈이 있는 한 보지 않을 수 없고 발이 있는 한 걷지 않을 수 없다. 듣지 않는 것은 귀가 아니고 걷지 않는 것은 발이 아니다. 귀로 걸을 수 없는 것처럼 발로 걷지 않을 수 없다. ‘귀 있는 자는 들어라.’ 이 단순한 문장에 담긴 뜻이 깊다. 이 문장의 체언을 바꾸면 무한히 많은 유사한 경구가 만들어진다. 눈 있는 자는 보라. 발 있는 자는 걸어라.

그런데 이 명령문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발 있는 자는 걸어라’의 수신자는 누구일까. 누구를 향해 하는 말일까. 누가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걸까. ‘귀여, 들어라’라고 말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만 생각하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수신자는 ‘귀’가 아니라 ‘귀 있는 자’이고, ‘발’이 아니라 ‘발 있는 자’이다. 귀가 듣는 역할을 하지만 듣는 것은 귀가 아니라는 것, 발이 걷는 활동을 하지만, 걷는 것은 발이 아니라는 생각이 이 문장 속에 들어 있다. 귀를 가진 이가 (귀로) 듣고 발을 가진 이가 (발로) 걷는다. 귀가 아니고 발이 아니다. 귀는 의식의 주체일 수 없으므로 들을 수 없고 발 역시 그러하므로 걸을 수 없다.

그러니까 ‘귀 있는 자는 들어라’는 일종의 준말인 셈인데, 이 문장의 완전한 형태는 ‘귀가 있다는 의식이 있는 자는 들어라’일 것이다. 들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들으라는 것. 마찬가지로 ‘발 있는 자는 걸어라’는 문장이 향하고 있는 것도 발이 있다는 의식을 가진 자이므로, 발길 가는 대로 무의식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가지고 걸으라는 것이다.

내가 프로방스에서 할 일은 걷기와 쓰기. 나는 의식적으로 걷고 의식적으로 쓸 것이다. 늘 하던 것보다 더 많이 하고 더 잘할 것이다. 데카르트의 익숙한 경구를 흉내 내어 말하자면, “나는 걷는다. 그러므로 나는 쓴다.”

이승우 소설가·조선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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