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어제 국회 시정연설에서 사람중심 경제, 적폐청산, 한반도 평화정착을 국정목표로 제시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보다 민주적인 나라,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나라는 국민이 요구한 새 정부의 책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은 연설에서 ‘국민’을 70차례 언급하고 ‘경제’(39회), ‘국가’(25회), ‘나라’(14회)를 거론하면서 국가의 의무를 강조했다. 적폐청산은 단 한 차례만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시정연설에 앞서 국회의장실에서 여야 지도부를 만나 “지혜를 모아 달라”고 당부했고, 연설 후에는 야당 의원들에게 다가가 악수를 나눴다. 첫 정기국회에서의 입법 성과는 향후 5년 국정개혁 성패를 좌우한다. 야당과의 소통을 강조한 대통령의 이런 노력이 국정방향 전환의 신호탄이길 기대한다.
문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 동시 실시’를 강조하며 선거구제 개편을 촉구했다. 그러나 예민한 권력구조 문제는 빼놓고 지방분권과 기본권만 언급했다. 국회가 권력구조에 합의하지 못한다면 합의한 분야에만 한정해서라도 개헌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지방선거 이후 개헌’을 밝힌 바 있다. 야당의 설득을 위해선 합리적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여소야대 상황에서 민주당만으로는 어떤 법안도 통과시킬 수 없다. 그러나 적폐청산을 둘러싸고 여당과 주요 야당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대통령이 자세를 낮추고 소통을 시작한 만큼 여당도 야당을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야와 청와대가 한 발씩 물러나 예산안 심의와 민생·개혁 입법에 속도를 내기 바란다.
내년도 정부 예산은 429조 원으로 올해보다 무려 7.1% 늘었다. 증가율은 2009년(10.2%) 이후 최고치다. 대통령은 일자리복지 예산을 대폭 늘린 이유를 ‘사람중심 경제’를 화두로 설명했다.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를 사람중심 경제로 바꾸고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겪어온 양극화 문제와 성장의 과실이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는 불합리한 구조를 개선하려면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예산안은 논란을 빚은 정책들과 맞물려 있다. 오히려 법인세 인상은 기업 부담을 늘리고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를 줄일 수도 있다. 공무원 증원으로 국가채무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우려도 크다. 국회는 예산안 심의과정에서 각 쟁점에 대해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이날 국가권력기관 개혁, 공공기관 채용비리 혁파부터 평창올림픽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영역을 빠짐없이 언급했다. 시정연설에 앞서 “정치 곳간은 옥죄는 게 아니라 베풀어야 한다” “최저임금, 비정규직, 여러 경제·복지정책 추진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야당 대표들의 지적도 새겨봐야 한다. 대통령이 70%대를 유지하고 있는 지지율만 믿고 독주해선 실타래같이 복잡하게 얽힌 정국 현안을 풀 수 없다.
국회도 예산안을 당리당략의 도구로 삼는 과거 구태를 반복해선 안 될 것이다. 국회에 계류된 법률안만 7000건이 넘는다. 밤을 새워 법안과 예산안을 심의해도 모자랄 판이다. 이번 정기국회가 내년 지방선거 성패의 분수령이 된다는 각오로 여야 모두 제대로 일하는 국회상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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