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한옥과 치유효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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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중구보건소 치매지원센터 내부. 장명희 원장 제공
울산 중구보건소 치매지원센터 내부. 장명희 원장 제공
장명희 한옥문화원 원장
장명희 한옥문화원 원장
환자의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최첨단 의료기구를 갖추는 것이 최선일까? 성능 좋은 의료기구가 치료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환경이 치유 효과를 높이며 사회적 비용도 줄여준다는 사실은 환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한다. 의료 심리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치료 도구로서 환경의 절대적 영향에 대한 실증적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치유를 위한 환경 조성의 핵심은 환자들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영국 에든버러에 본부를 두고 있는 매기센터(Maggie‘s Cancer Caring Centres)는 환경을 통한 심리적 안정으로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어 특히 인상 깊다. 센터는 고층의 초현대식 암병원 옆에 ‘집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간’을 짓고 암 환자들이 안정적 치료를 받도록 무료로 지원한다. 환자뿐만이 아니다. 환자의 가족, 심지어 세상을 떠난 환자의 친구들까지 누구라도 여기에 와서 그들의 상처를 치유받고 위로받는다.

환경 조성 전문가였던 매기 젱크스는 유방암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2년간을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 즉 병에 대한 공포와 정보에 대한 갈증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암 환자에게 필요한 환경에 대한 구체적 청사진을 그려 나갔다. 이 청사진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 매기센터라는 이름의 암 지원단체로 실현되었다. 현재 커밀라 왕세자비가 단체의 회장이고 모금을 통해 17곳의 암병원에 센터를 설립했으며 온라인과 국외로도 활동을 넓혀 나가고 있는 큰 사회단체가 되었다.

비싼 의료기구와 환자 수, 병원의 대형화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 비추면 이런 사례가 그저 부러울 뿐이지만, 드물게나마 이상을 실천하는 곳이 있어 희망을 갖는다. 그중 하나가 울산 중구보건소 치매지원센터다.

외관은 일반적인 보건소와 다르지 않지만 치매지원센터는 한식의 문과 마룻바닥, 툇마루 등으로 꾸며져 있다. 주 업무가 치매의 초기검진, 인지치료, 보호자 방문관리 상담인 이곳에서 치매 환자들은 한옥 마루에 방석을 깔고 앉아 음악, 미술, 생활 훈련 등의 인지재활 프로그램을 제공받는다. 환자를 동반한 가족들은 같은 시간에 또 다른 방 툇마루에 둘러앉아 치매에 관하여 가족이 알아야 할 정보를 공유하고,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를 얻는다.

인지장애를 겪는 이들은 공간에 대한 반응이 즉각적이어서 싫으면 오지 않는다. 그런데 이곳은 보호자가 동행할 수 없으면 혼자라도 오고 싶어 한다니 환자들의 공간에 대한 만족도가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다. 또 치료 전과 비교해 10% 정도 인지력 향상 효과도 나타났다. 그러다 보니 치매지원센터는 이제 보건소의 가장 자랑할 만한 시설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보건소 예산 형편을 아는 이들은 어떻게 이런 시설이 가능했는지 의아해한다. 여기에는 일선 공무원들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한국적 생활문화공간 발굴 및 확산’을 위한 지원 사업에 울산 중구보건소의 기획안이 선정된 결과이다. 울산 중구보건소 이병희 소장은 “치매 환자에게는 정서적으로 친숙한 공간이 치료 효과가 높다. 사용자 연령대가 한국적 공간에 친숙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한옥 공간이야말로 치매 치료에 맞춤한 공간이다”라고 생각했다니 그 혜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욕심을 부리자면, 공간의 완성도가 아쉽기는 하다. 지원금을 받았다 해도 충분했을 리 없고 한옥 공간을 제대로 실현할 전문가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한옥이 주는 정서적 친근감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 치료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를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크다.

한옥이 한국인에게 친숙하고 편안한 공간이라는 생각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을 터이다. 비단 치매지원센터뿐만 아니라 정서적 안정을 필요로 하는 대상은 많다. 서울 강남의 한 정신건강의학과병원에서는 한지 바른 창문 한 짝을 단 것만으로도 환자들이 편안한 마음으로 상담을 받고 있다. 그러니 한국적 공간 보급을 넓혀 나가면 어떨까? 지속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치유 공간은 물론이고 교육시설 장애인시설 노인시설 어린이시설 등으로의 다양한 적용을 기대해 본다.

장명희 한옥문화원 원장
#한옥#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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