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27>지방에서 산다는 것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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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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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10만이 안 되는 K시 지역 농협에서 근무하는 영호 씨는 좀처럼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재킷을 걸쳐 입고,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자동차 키를 집어 들었다.

“네가 앞장서!”

영호 씨는 거실 소파에 죄인처럼 앉아 있던 아들에게 말했다. 이제 고등학교 일학년인 그의 아들은 고개를 잔뜩 수그린 채 말이 없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니 영호 씨는 더 부아가 치밀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냥 넘어가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말 오후, 친구와 인근 광역시로 영화를 보러 간다며 외출했던 아들은, 그러나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의 한쪽 눈은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오른쪽 뺨엔 생채기가 나 있었다. 입고 나갔던 셔츠의 단추도 두세 개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아내는 그런 아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짧게 비명부터 질렀다. 아들은 자기 방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이내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들은 친구와 만나 광역시행 버스를 타러 가던 중 거리에서 학교 선배 네 명을 우연히 마주쳤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좀 ‘논다고’ 소문 난 그 선배들은, 아들과 친구에게 대뜸 돈을 좀 꿔달라고 부탁했다. 아들은 무섭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가진 돈이 없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그래? 그럼 뭐 어쩔 수 없지. 그럼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선배들은 아들과 아들 친구에게 자기들 대신 저쪽 골목길 끝에 사는 여자아이한테 쪽지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인데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들은 뭐 그 정도쯤이야 하면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뒤따라 온 선배들이 돌변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 차마 아들의 멱살을 잡지 못했던 선배들은, 인적 뜸한 골목길에 이르자 비로소 본색을 드러낸 것이었다.

“어쩌려고요?”

소파에 앉아 있던 아들의 손을 잡아끌고 현관문을 나서는 영호 씨를 아내가 잡았다.

“어쩌긴? 내 이놈의 자식들, 콩밥을 먹이고 말 거야!”

경찰서에 도착해 평소 알고 지내던 최 형사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한 지 두 시간 만에 사거리 PC방에 있던 아들의 선배 네 명이 줄줄이 경찰서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아들은 그들을 보자마자 바들바들 다리를 떨었다. 영호 씨는 그런 아들의 허벅지를 꽉 잡아 주었다. 선배 아이들이 끌려 들어온 지 한 시간쯤 지난 뒤엔, 그 아이들의 부모들이 하나 둘 경찰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이게 누구야? 김 과장 아니야? 야, 이거 김 과장을 여기서 다 보네.”

선배 아이의 아버지 한 명이 영호 씨를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영호 씨도 잘 아는 시내 ‘홍묘종업사’ 박 사장이었다. 영호 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박 사장과 악수를 했다.

“아니, 박 사장님은 지난번 모임엔 왜 안 나오셨어요? 우리 조합장님이 얼마나 걱정 많으셨는데.”

“그날 우리 어머니가 갑자기 체기가 있어 가지고…. 말도 마,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근데 쟤가 김 과장 아들이었어?”

“아, 네… 아, 그럼 쟤가 박 사장님 아들이었어요?”

영호 씨와 박 사장은 최 형사 앞에 나란히 앉으면서 말했다. 박 사장은 최 형사에게도 ‘지난번 보일러 고친 거 잘 돌아가지?’라고 물었다. 다른 선배 아이들 아버지도 박 사장과 영호 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 명은 영호 씨와 몇 번 마주친 적 있었던 동사무소 계장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시내 추어탕집 사장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안면이 전혀 없었지만 박 사장과는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영호 씨와 그들은 최 형사 앞에 앉아 다가올 농협 조합장 선거에 대해서 오랫동안 이야기했다.

가만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 형사가 물었다.

“근데, 애들 건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그때까지 계속 서로 말을 주고받던 영호 씨와 다른 아버지들은 잠깐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가 영호 씨가 먼저 툭 말을 꺼냈다.

“애들끼리 싸운 걸 갖고 뭘요. 지역사회에서 그런 일로 얼굴 붉히면 되나요?”

영호 씨가 그렇게 말하자, 박 사장이 ‘그럼, 애들 땐 원래 다 그렇게 크는 법인데, 뭘. 우린 땐 안 그랬나?’ 하면서 호탕하게 웃었다. 영호 씨도, 다른 아버지들도 따라 웃었다.

영호 씨의 아들은 그런 자신의 아버지를 멀뚱멀뚱, 서서히 판다 눈으로 변해가는 눈두덩을 어루만지면서 바라보다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기호 소설가
#지방#영호#박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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