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빅토르 안’을 만든 복마전 체육계

  • 동아일보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한국 배드민턴의 간판 이용대 선수가 도핑 테스트 적발이 아닌 ‘소재지 불분명’으로 자격정지 1년을 받게 된다는 뉴스가 보도된 지난달 말, 일반인들에게 스포츠를 가르치는 탁구·수영 코치들을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 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이들은 국가대표까지는 가지 못했지만 실업팀이나 대학팀에서 운동을 계속하고 이후 운동을 업(業)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생활인들이었다.

“어떻게 ‘이용대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라는 기자의 물음에 이들의 답은 충격적이었다. “지금 같은 체육계 풍토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배드민턴협회가 이용대 선수를 일부러 죽이기 위해 그런 일을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이어 경험담들이 터져 나왔다.

“고3 때 감독 선생님이 실업팀에 넣어줄 테니 현찰 1억 원을 갖고 오라고 했다. 그때 너무 충격을 받아 운동을 그만두려 했었다. 돈을 줘야 시합에 출전시키는 경우도 흔하다. 재능은 있지만 부모 재력이 안 돼 그만둔 친구들도 있다.” “대회 때 누구누구를 떨어뜨리자, 밀어주자는 담합도 많다.”

한 여자 코치의 말은 더 충격이었다. “돈도 돈이지만 인권침해도 오랜 관행이다. 여자 선수들의 경우 감독이나 코치로부터 성폭력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이들이 전하는 한국 체육계는 한마디로 ‘진흙탕’이었다. 한 체육학과 교수도 최근 기자에게 “현재 연맹이나 협회를 운영하는 스포츠 행정가들은 ‘자기들만의 섬’에서 자기들 맘대로 룰을 정하고 부당한 힘을 행사해 온 지 너무 오래돼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집단 불감증에 빠진 상태”라고 했다.

한국 쇼트트랙 사상 최고의 기량을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러시아로 국적을 바꾼 안현수(러시아명 빅토르 안·29)를 보며 새삼 체육계를 성토했던 이들의 말이 떠올랐다. 안 선수가 빙상연맹의 파벌, 연고주의, 승부조작에 환멸을 느껴 귀화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 안 선수 아버지가 최근 라디오에 출연해 “안 선수 동생인 막내아들(쇼트트랙 선수)까지 외국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니 안현수 파동 이후에도 연맹의 변화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빙상뿐 아니다. 재일동포 4세로 2001년부터 유도계 절대 강자로 떠오르며 각종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태극마크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 귀화를 택한 종합격투기 선수 추성훈(일본명 아키야마 요시히로). 그는 2008년 2월 TV에 출연해 “한국은 (학연이 없는) 나를 이방인 취급했고 유도계의 파벌로 판정승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었다. 나뿐 아니라 실력이 좋은데도 파벌로 인해 판정승에서 지는 선수들이 많다”고 폭로했었다.

2013년 마린보이 박태환과 대한수영연맹의 갈등, 한국 여자축구 간판 박은선의 ‘성별 논란’에서도 확인했듯 스포츠 단체가 스타들을 품기는커녕 운동을 그만두고 싶게 만드는 원인제공자 역할을 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2년 11월엔 프로농구연맹(KBL)과 대한농구협회의 심판 경기조작이 체육계를 뒤흔들기도 했다.

체육계의 비리는 가히 전방위적이라 할 만하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대한체육회 등 체육단체 2099개를 대상으로 한 감사 결과에 따르면 조직 사유화, 국고 및 예산 횡령, 선수 선발 불공정, 심판 부정이 도를 넘는다. 마침내 13일 대통령까지 나서 “파벌주의, 줄세우기, 심판 부정 등 체육계 부조리를 근절하라”고 주문했다. 대통령은 최근 규제개혁과 관련해서도 ‘물면 안 놓는 진도개 정신’을 강조했다. 복마전 체육계야말로 진도개 정신으로 비정상의 정상화가 시급한 곳이다.

허문명 오피니언팀장 angelhuh@donga.com
#체육계#빙상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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