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3>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었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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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었네
―박준범(1978∼)

멋쟁이 화이바를 쓰고
멋쟁이 오토바이를 타고
이 도시를 달린다
바람을 가르며
이 도시를 달린다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아 근데 스치는 바람에 머리가 가려워
머리를 긁었네
아 긁어도 긁어도 머리가 하나도 안 시원해
아 긁어도 긁어도 머리가 하나도 안 시원해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쓰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쓰고 머릴 긁었네
화이바를 쓰고 머릴 긁었네
화이바를 벗고 머릴 긁었네

아 머리가 시원해
아 머리가 시원해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서 그런가 봐

그래 이제부터는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야지
그래 이제부터는 화이바를 벗고 머리를 긁어야지


마을버스가 다니는 비탈 길가에 빈 가게 터가 있었다. 그 유리벽 너머로 두어 사람이 뭔가 뚝딱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여 무슨 공간이 되려나 궁금했는데 반갑게도 책방이다. 그런데 진열대의 책자들이 생소하다. 작거나, 얇고 넓적한 게 팸플릿처럼 보이는 책이 많다. 어쨌든 환영과 격려를 전하고 싶어 들어갔다. 열댓 걸음이면 한 바퀴 둘러볼 공간. 안벽에 비치된 책들도 생소하다. 내게는 거실이라는 게 없지만, ‘거실 인테리어’를 속으로 찜해놓고 중앙 진열대를 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책표지가 있다. 박준범 시집 ‘우주는 잔인하다’. 표지를 훑어보는 순간 웃음이 터졌다. ‘문학과죄송사’! ‘문학과지성 시인선’을 그대로 패러디했는데, 표지에서 판권란을 거쳐 뒤표지(표사)글까지 웃음폭탄이다. 해설자 이름 ‘피코테라’를 보는 순간에도 웃음이(실례!) 터졌는데, 해설이 어찌나 근사하던지! 수록된 시들도 썩 좋다. 어떤 시들은 가렵고, 어떤 시들은 시원하고, 어떤 시들은 아리다. 이제부터 ‘화이바’, 제도권의 안전모를 벗고 내달으련다는 상쾌한 백서! 시인 박준범과 피코테라, 그리고 비탈길에 독립출판물 서점을 낸 청년, ‘불평이 존재조건이 돼버린 상황에서 전혀 강렬하지 않은 암담함’(해설에서)을 사는 젊은이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힘내세요!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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