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214>막고 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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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 품다
―정끝별(1964∼)

김칫국부터 먼저 마실 때
코가 석자나 빠져 있을 때
일갈했던 엄마의 입말, 막고 품어라!
서정춘 시인의 마부 아버지 그러니까
미당이 알아봤다는 진짜배기 시인의 말을 듣는
오늘에서야 그 말을 풀어내네
낚시질 못하는 놈, 둠벙 막고 푸라네
빠져나갈 길 막고 갇힌 물 다 푸라네
길이 막히면 길에 주저앉아 길을 파라네
열 마지기 논둑 밖 넘어
만주로 일본으로 이북으로 튀고 싶으셨던 아버지도
니들만 아니었으면,을 입에 다신 채
밤보따리를 싸고 또 싸셨던 엄마도
막고 품어 일가를 이루셨다
얼마나 주저앉아 막고 품으셨을까
물 없는 바닥에서 잡게 될
길 막힌 외길에서 품게 될
그 고기가 설령
미꾸라지 몇 마리라 할지라도
그 물이 바다라 할지라도


메모를 휘갈겨 놓은 종이쪽이니 우편봉투니 공책이니 수첩 등이 과자봉지들이며 깡통이며 컵과 뒤섞여 퇴적층을 이룬 내 식탁 위 어딘가에 정끝별과 그 가족의 사진이 여러 컷 담긴 종이 한 장이 있을 테다. 정끝별 특집이 실린 문예지에서 뜯어낸 것이다. 그 자신이나 가족 구성원이 세상과 겉돌고 결손 된 이들을 많이 봐와서일까, 시인이 제공했을 스냅사진들에서 엿보이는 화목하고 온전한 가정의 딸의 면모가 신선했다. 그리고 부러움과 그리움이 아릿하게 피어올랐다. 정끝별 시의 곧음, 품 넓음, 조화로운 정서, 한 마디로 건강함의 유래를 알 것 같았다.

정끝별 시는 능청스러우리만치 청산유수로 낭창낭창 읊어내는 말맛이 일품이다. 내용은 웅숭깊다. 그 나이에 이런 시어를? 그런데 생각해 보니 정끝별도 이제 만만치 않은 나이다. “이제는 애들도 다 마흔이 넘었어!”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애들(?)도 다 쉰이 넘었네! 형제 많은 집의 막내는 철부지 응석받이거나 애어른이기 쉬운데, 정끝별은 후자다. 자기보다 연배 높은 가족들 속에서 일찍부터 그들의 경험과 좋은 것을 다 빨아들인 막내. 그래서일까. 그의 초기 시들에서는 어딘지 겉늙은 느낌을 받았는데, 언제부턴가 시가 활기차게 무르익었다. ‘막고 품다’는 시에 나왔듯이, 둑을 쌓아 물길을 막고 그 물을 다 퍼내 물고기를 모조리 잡는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김칫국부터 마실 때’도 있고 코가 석자나 빠질 일도 만난다. 어차피 닥친 일이라면 피하지 말고, 요령도 부리지 말고, 받아들여 품으라는 어머니 말씀. 결국은 우직한 이들이 지구를 지킨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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