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 최대공약수 찾아, 서로 존중하는 품격운동 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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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5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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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안창호, 1913년 美서 흥사단 세워 엘리트 육성… 조국의 독립-발전 꿈꿔
흥사단 창립 100주년… 사회원로들 특별대담

《 흥사단(興士團·영문명 Young Korean Academy)은 1913년 5월 13일 도산 안창호(사진)가 일제강점기 자주독립과 번영을 위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립한 단체다. 창립 당시에는 유석 조병옥(충청도 대표)을 포함해 8도 대표들과 25명의 단우로 시작됐다.

도산은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을 표방하는 건전한 엘리트를 양성해 조국 독립과 국가 발전을 이루려 했다. 흥사단이 이후 100년 동안 단체 명의의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 정치활동을 하지 않은 바탕에는 이러한 도산의 사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회원들 대부분이 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이런 기풍은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1970년대 말 전국적으로 회원이 3만여 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전국적으로 약 1만2000명이 활동하고 있다. 등산 독서 등을 통한 수련활동과 각 지역에서 인재를 양성하는 아카데미 운동, 통일 및 투명사회 운동, 독립유공자 후손 돕기 운동 등을 펼치고 있다. 흥사단의 대표적인 사회교육 프로그램인 ‘금요개척자강좌’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시민강좌로 195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흥사단은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아 ‘도산의 발자취를 찾아서’(6월), ‘나라사랑 국토 순례’(7월), 창작 오페라 ‘선구자, 도산 안창호’ 공연(5월 10∼12일)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칠 계획이다. 》

흥사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간담회를 하고 있는 원로들. 왼쪽부터 반재철 흥사단 이사장, 안기영 전 서울변호사협회장, 김재순 전 국회의장, 윤병욱 전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 양영두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 사진 아래쪽 한자는 도산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애기애타(愛己愛他)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자’는 의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흥사단 창립 100주년을 맞아 간담회를 하고 있는 원로들. 왼쪽부터 반재철 흥사단 이사장, 안기영 전 서울변호사협회장, 김재순 전 국회의장, 윤병욱 전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 양영두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 사진 아래쪽 한자는 도산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애기애타(愛己愛他)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자’는 의미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사람이든 단체든 100년을 이어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단체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일정 기간 흥할 수는 있지만 시간이 흐르고 시대와 사람이 변하면서 본래의 성질을 잃고 이합집산 때문에 결국 쇠퇴하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흥사단(興士團).

1913년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1878∼1938)가 민족의 자주독립과 번영을 위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그 흥사단이 13일로 창립 100주년을 맞는다. 독립운동과 광복 후 조국근대화, 민주화운동에 이르기까지 흥사단 100년은 대한민국 현대사와 일치한다. 이에 동아일보는 흥사단 100주년을 맞아 흥사단 출신 사회원로들과 함께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지난달 29일 가진 대담에는 김재순 전 국회의장(90·흥사단 단우·샘터 창립인), 안기영 전 서울변호사협회장(98·전 흥사단 이사장), 윤병욱 전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현 전국미주한인재단 명예회장), 반재철 흥사단 이사장(64), 양영두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공동대표(흥사단창립100주년 홍보기획단장)가 참석했다. 대담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샘터사의 김 전 의장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이념 배제… 좌우익 모두 가입할 수 있어

―흥사단 창립 배경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무엇이었나.

(김 전 의장·이하 김) “흥사단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인 공립협회(1905년)와 비밀결사조직인 신민회(1907년)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09년 신민회 산하에 청년운동단체인 ‘청년학우회’가 설립됐는데 도산이 1913년 5월 13일 이 단체를 발전적으로 계승해 흥사단을 창립했다. 도산은 독립운동에 헌신할 지도자를 양성하고 독립국가를 건설한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는데 흥사단은 바로 이런 사람을 키우기 위한 목적으로 창립됐다.”

―요즘 세대들은 흥사단을 보수단체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안 전 회장·이하 안) “흥사단은 단체의 이념성, 정치성을 철저히 배제한다. 또 좌우익을 따지지 않고 누가 어떤 성향과 사상을 갖고 있는지도 관계없다. 따라서 과거에도 좌우익이 모두 가입할 수 있었다. 물론 각 개인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어떤 활동도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체의 이름을 걸고 하지는 못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날개를 달고 있는 몸통이다. 우리는 이런 몸통 같은 사람들을, 그런 사람의 자질을 키우는 단체다.”

실제로 도산은 국가에 필요하다면 점진적 사회주의(페이비어니즘·Fabianism)나 노동조합주의(신디컬리즘·Syndicalism) 등도 우리에게 맞는 부분이 있다면 연구해 채택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 군부독재 시절까지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정치성이 있었던 것 아닌가.

(윤 전 위원장·이하 윤) “백범 김구(1876∼1949)를 비롯해 상하이임시정부 시절 간부의 약 70%가 흥사단 출신이었다. 광복 직후 군정 시절 주요 간부들도 유석 조병옥(1894∼1960)처럼 흥사단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나라가 필요로 한 인재의 대부분이 흥사단 출신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적인 단체처럼 보일지는 모르지만 그런 사람들을 키워낸 결과다. 광복 직후 유석이 ‘흥사단을 정당화하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며칠간의 난상토론 끝에 결국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을 냈다.”

―흥사단과 동아일보의 인연이 적지 않다.

(김) “도산이 서울에 올 때마다 지금 서울시청 근처의 중앙여관에 자주 머물렀다. 그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사람이 바로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1891∼1955)였다. 두 분이 서로 맞절을 하고 나면 인촌이 도산이 앉았던 방석 밑으로 손을 넣었다 뺐다고 한다. 몰래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한 것이다. 한번은 당시 돈으로 1000원 정도를 줬다고 하는데 소학교 교사 월급이 35원 정도였을 때이니 큰돈이었다. 인촌은 도산이 돌아가시기 전 병원비도 도와주는 절친한 사이였다.”

(윤) “도산이 1925년 1월 다섯 번에 걸쳐 동아일보에 ‘국내의 동포에게 드림’이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독일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과 유사한 성격의 글이었다. 동포의 자각과 헌신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이 중 마지막 것은 당시 총독부에 의해 전면 삭제됐고 이 때문에 동아일보가 일정 기간 정간을 당했다.”

도산의 글 실은 동아일보 정간 당하기도

그의 말이 끝나자 반 이사장이 동아일보 1922년 10월 19일자에 난 흥사단 관련 기사를 꺼내보였다. 상하이에 있는 흥사단 간부가 권총 80여 정와 탄약이 든 상자 15개를 통의부(統義府·1922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했으며, 이들이 무장한 채 조선으로 침입할 계획이라는 내용이다.

―군부독재 시절 흥사단의 아카데미운동이 민주화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 이사장·이하 반) “1961년 5월 16일 군사정권이 수립되면서 헌정 중단과 함께 집회·결사의 자유가 박탈되고 흥사단은 2년 2개월 동안 활동을 정지당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청소년 육성사업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것이 ‘아카데미운동’이었다. 1963년 활동이 재개되면서 서울 등 각지에 분회를 세우고 이후 20여 년간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때 참여한 학생들이 이후 군부독재 타파, 민중의 자각, 민주화운동의 큰 물줄기가 됐다. 대표적인 사건이 1975년 10월 19일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 흥사단아카데미 소속 학생 5명이 ‘김지하 양심선언’을 게재한 유인물을 배포하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흥사단아카데미사건’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과거만큼 흥사단 활동이 활발한 것 같지 않다.

(반) “가장 아픈 말이다. 정치 이념단체가 아니라 단우(단원)들이 개별적으로 활발한 사회운동을 하다 보니 정권에 의한 부침이 많았다. 자유당과 군부독재 시절에는 정권에 ‘찍혀’ 신입 단우들을 받을 수 없었다. 또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불온 서클’로 낙인찍혀 ‘금지단체’가 되기도 했다. 젊은 피가 수혈되고 활동을 이어나갈 기반이 사라진 것이다. 이후 시대가 변하면서 젊은층에서 민족, 사회에 대한 관심이 멀어진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양 공동대표·이하 양) “민주화시대를 지나면서 시민운동이 단체별로 전문화 흐름을 보였는데 흥사단은 통일, 교육, 투명사회운동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하다 보니 주목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일본의 우경화를 지켜보는 심정이 남다를 것 같다.

(안·양) “아베 신조 총리 등 극우 지도자의 말과 행동이 일본 국민들에게 일견 시원하게 보이는 면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 국민들은 100여 년 전 자신들이 걸었던 극우의 길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한때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승승장구했지만 결론은 패망이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집단은 언제나 끝이 좋지 않다. 잘못된 판단과 행동을 하더라도 제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일본의 비이성적인 행태에 분개만 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 명심하고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는 점이다.”

일본은 과거 ‘극우의 길’ 돌아봐야

―흥사단이 국내에 머물지 말고 국제적인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윤) “옳은 지적이다. 국제적 사회단체인 라이온스클럽, 로타리클럽을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이 단체들은 출범부터 민족 개념이 없고 나라와 사회, 이웃을 위한 봉사에 초점을 맞췄다. 세계 각국에서 단체를 만들 수 있는 평등한 권리가 보장됐고 따라서 국제적인 단체로 비약한 것이다. 물론 흥사단은 일제강점기 독립이라는 지상명제를 갖고 출범했기 때문에 상황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시대와 상황이 변한 지금 흥사단도 민족이라는 개념을 더 확장해 세계 시민을 키워내고 흥사단 미주지부를 중심으로 세계 속의 단체로 거듭나야 한다.”

―10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목표는….

(양) “지금의 한국은 일제강점기 자신의 삶을 희생하고 독립운동에 매진한 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3개월 이상 옥고를 치르지 않은 분들은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탈락된다. 꼭 생명을 잃고 감옥에 간 분들만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인촌 선생처럼 독립운동자금을 대는 일도 당시로서는 목숨을 건 행동이다. 이런 분들도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고치는 노력을 하겠다.”

(반) “우리 사회가 지금 진보 보수로 갈려 갈등이 심하다. 한 가지 정책을 놓고도 서로 보는 시각이 다르니 언제나 싸움만 난다. 좌우익을 따지지 않고 모두의 최대공약수를 찾아 단체를 구성했던 흥사단정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지금 흥사단이 특색이 없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광복 전후 극심한 좌우익의 대립 속에서도 흥사단이 그런 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1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다. 흥사단의 4대 정신인 ‘무실(務實) 역행(力行) 충의(忠義) 용감(勇敢)’을 바탕으로 범사회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고 상대방의 장점을 바라볼 수 있는 정신적 품격 향상 운동을 할 계획이다.”

이진구 기자 sys1201@donga.com
#흥사단#도산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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