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재명]동질성의 폭력성

  • 동아일보

이재명 정치부 기자
이재명 정치부 기자
유아인과 조정치. 달라도 너∼무 다르다. 영화 ‘완득이’의 배우 유아인은 꽃미남과다. 반면 기타리스트인 조정치는 지난해 TV프로그램 ‘무한도전’의 ‘못친소(못생긴 친구를 소개합니다)’ 편에 출연하며 예능 기대주로 떠올랐다. 거지도 ‘꽃거지’가 대세인 세상에서 조정치는 연예인의 외모 지평을 크게 넓힌 그야말로 ‘못친’이다.

꽃미남과 ‘못친’이 한 휴대전화 CF에 등장한다. 그 낯섦이 이 CF의 무기이자 메시지다. 산업과 대중문화에서 낯섦은 흥행코드가 된 지 오래다. 대중의 폭발적 열광은 낯섦 없이 불가능하다. 단군 이래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 된 싸이가 그랬던 것처럼.

조정치식 낯섦의 반전이 가장 필요한 분야가 바로 정치다. 정치는 낯섦과 거리가 멀다. 도돌이표가 붙은 네 마디 악보 같다. 첫 마디는 여야의 극한 대립으로 시작한다. 국민은 왜 싸우는지도 잘 모른다.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면 둘째 마디에서 서로의 이익을 챙긴 뒤 극적 합의에 이른다. 셋째 마디는 정치를 바꾸겠다는 약속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넷째 마디. 해외로 놀러 가고 지역구 챙기느라 여의도 정치는 쉼표다. 그러다 다시 첫 마디로 돌아간다. 거기에 감동의 선율이 자리할 여지가 없다.

지난 대선 ‘안철수 현상’은 낯섦의 반격이었다. 하지만 낯선 인물의 등장→기성 정치권의 공격과 여론 검증→뒷심 부족과 몰락은 대선 때마다 반복돼 온 또 다른 도돌이표 정치의 한 장면이다. 이런 무한 반복에 익숙한 정치권은 파격과 낯섦을 경계한다. 한 전직 대법관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나르는 낯섦을 보도하면 곧바로 ‘언론이 이 인사를 띄우는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던지는 곳이 정치권이다.

낯선 것에 대한 거부감, 곧 동질성의 강요는 일종의 폭력이다. 모두가 같아야만 한다는 동질성의 과잉이 21세기를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의 세기로 만들었다는 게 재독 철학자 한병철 베를린 예술대 교수의 진단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같은 것에 의존하는 자는 같은 것으로 인해 죽는다”고까지 했다.

박근혜 정부를 보면 동질성의 과잉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관료나 연구원 출신이 장차관의 4분의 3이다. 그럼에도 낯섦에서 출발하는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국정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낯설다. 더욱이 ‘나는 약속하고 장차관은 지킨다’는 게 박 대통령의 확고한 신념이다. 동질성이 강한 집단이 동질적 사고를 강요받으며 이질성을 전제로 한 융합과 창조를 이뤄내겠다니 진정한 역설 아닌가.

그나마 이질적인 ‘아메리칸드림’ 김종훈과 ‘벤처 1세대의 상징’ 황철주마저 어이없게 사퇴했다. 빈자리가 생길수록 관료들은 쾌재를 부를 터다. 경제든 문화든 이질성의 수용 없이 융성한 사례가 없다. 이질적 인재 찾기는 박 대통령의 모든 구상의 출발이다. ‘문명이란 불명확하고 일관성 없는 동질성에서 명확하고 일관성 있는 이질성으로 향한 하나의 과정이다.’ 영국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의 말이다.

이재명 정치부 기자 egija@donga.com
#동질성#폭력성#박근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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