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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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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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이 내린 날, 전북 고창에 있었다. 그곳에 머문 이틀 동안 계속 눈이 내려서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선운사에 갔다. 단풍철에는 장터처럼 붐비던 사찰이 순백의 눈 속에서 적막했다. 누군가 무료했던 것일까? 대웅전 앞마당에 커다란 눈사람(사진)을 만들어 놓았다. 한두 번 만들어본 솜씨가 아니다. 모자를 쓰고 장갑까지 낀 멋진 눈사람이 싱긋 웃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눈사람을 만들어본 게 언제였던가, 언제부터 눈사람을 만들지 않게 되었는가를 헤아려 보았다. 햇빛이 나면 곧 녹아버리고 만다는 것을 여러 번 체험하고부터였을까? 눈이 오면 교통대란부터 걱정하게 된 나이와 무관치 않을지 모른다. 실용적인 셈에 익숙해지면서 셈 너머의 것들을 놓쳐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아이 어릴 적 일이다. 서둘러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우리 집 현관문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쓴 메모가 한 장 붙어 있다. “산타 할아버지. 여기에 착한 아이가 살고 있어요. 꼭 오세요.” 겨우 한글을 깨친 다섯 살 먹은 아들이 산타클로스에게 보내는 간곡한 초청장이었다. 행여 산타 할아버지가 빠뜨리고 그냥 지나가 버릴까 염려하는 아들을 위하여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학교에 들어가면서 아들은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곧 모든 정황을 알아차렸다. 그 이후 아들은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초대하지 않았으므로 산타는 더이상 그에게 오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곧 녹아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사람을 만든다. 눈사람에게 밀짚모자를 씌워주고 장갑을 끼워주고 목도리까지 둘러준다. 단 며칠이어도 너무 춥지 않게 너무 쓸쓸하지 않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어쩌면 영원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사랑을 맹세한다. 미리 이별을 걱정하지 않고 그 순간을 사랑한다. 겨울이 가고 눈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진다고 해서 눈사람의 기억마저 잊힐 수 있을까. 과연 시작하지 않은 사랑이 영원하지 못한 사랑보다 더 나은 것일까?

올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어 보아야겠다. 금방 녹을 거야, 소용없는 우스운 짓이야, 계산하지 않고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펑펑 내리는 눈을 뭉치고 둥글게 굴려 나의 눈사람을 만들어 봐야겠다. 또한 이별 따위는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을 시작하면 어떠리. 무의미하게 쌓여 있다가 녹아버리는 것보다 훨씬 의미 있지 않은가?

악보는 노래하고 연주할 때 비로소 음악이 된다. 좋아하는 마음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사랑이다. 그러지 않으면 종이에 불과할 뿐이고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뭉쳐 사람을 만들고 가슴에 고여 있는 따뜻함을 퍼내 사랑을 만들자. 세상을 가득 덮은 하얀 눈처럼 풍성한 추억이 남을 것이다.

윤세영 수필가
#눈#눈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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