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高價)의 치과용품 생산업체로 국내시장 점유율 50% 남짓한 회사가 있다. 이 회사의 사장은 관가에 발을 잘 들여놓지 않는다. 한 공무원이 그에게 “왜 정책자금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맛들이면 큰일 난다. 사업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눈먼 돈’만 찾아다닌다. 끊을 수 없는 마약”이라고 대답했다. 어떤 기업은 보증기금의 신용자금, 지식경제부 중소기업청 경기도 등의 지원자금을 빙글빙글 돌아가며 얻어 쓴다. 이런 회사의 연구원들은 기술 연구보다는 ‘돈 타내는 데 필요한 그럴듯한 보고서 쓰기’를 주 업무로 삼는다. 그러다 자금줄이 끊어지면 회사는 죽는다.
2010년 말 현재 정부가 ‘벤처’로 인증한 기업은 2만4600여 개로 2005년 대비 2.5배로 늘었지만 벤처캐피털 등으로부터 민간투자를 받은 순수한 의미의 ‘벤처투자기업’은 전체의 2.5%에 불과하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가 나왔다. 반면에 기술보증기금이나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기술평가 보증·대출’ 기업이 90.6%에 이른다. 이 같은 공공 정책자금은 상대적으로 심사가 느슨할 뿐 아니라 부실이 생기면 국민 부담으로 돌아온다.
벤처업계가 이렇게 정책자금에 중독된 것은 공무원이 주무르는 돈이 너무 많아서다. 눈먼 돈이 굴러다니면 그것을 먹고사는 개체나 종(種)이 생겨나는 것이 경제 생태계의 생리다. 벤처기업의 자생력이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벤처기업의 코스닥 상장 비율이 최근 1%대 수준이다. 중견기업 진입을 회피하면서 10년 이상 벤처기업에 머무르는 기업도 나타나고 있다. 벤처도 옥석(玉石)을 가려야 한다.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는 국가 주도의 벤처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하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모태(母胎)펀드 2조 원 조성 및 엔젤투자 기금 확충을 약속했다.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세제(稅制) 클라우딩펀딩 컨설팅 지원 등으로 생태계를 활성화하겠다고 밝혔다. 각 후보의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지켜봐야 하겠지만 정부는 시장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지 시장을 대체하려 들면 안 된다. 연구 지원도 과정과 성과를 엄밀히 검증할 수 있는 정교한 장치가 마련된 뒤 해야 한다. 자칫 잘못하면 정부가 시장만 왜곡할 수 있다. 제대로 할 자신이 없으면 아예 손대지 않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