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17>노모(老母)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0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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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老母)
―전연옥 (1961∼ )

스타킹은 문갑 위에 있다

거 봐라 내 뭐랬니

이게 출근이냐 전쟁이지

내일 모레면 너도 이제 서른인데

다닐 때 안경 벗지 말고

또릿또릿 잘 보고 다녀야 한다

참내, 구둣솔은 네가 들고 있잖니

전철 안에서 또 졸지 말고

건널목에서도 좌우 잘 살피고 다녀라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 이러지

아, 잘 살피고 다녀야

네 맘에 드는 남자가 눈에 띄지

에미 잔소리 때문에

네 귀에 딱지가 앉았어도 할 수 없다

그러게 너는 어쩌자고 연애도 못 하냐

눈이 없냐 코가 째보냐

막둥이 시집보내느니

차라리 내가 가는 게 쉽겠다만

그래, 잘 보고 잘 다녀오너라

하이고 내 팔자야


막힘없이 술술 읽힌다. 젊은 처자의 삶과 노모의 삶의 랑데부. 어딘지 익숙한 풍경을 쉬운 일상어로 음악처럼 그린 시다. 옛날로 치면 타령이고 요즘으로 치면 랩인 엄마의 리드미컬한 잔소리. 엄마가 뭐 내내 혼자 읊조렸겠는가? 간간 소리도 빽 질러가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았을, 딸의 쫑알쫑알 대거리는 숨겨져 있다.

이 엄마의 잔소리는 번번이 결혼문제로 귀결됐으리. 행실 단정한 딸이 자랑거리에서 골칫거리로 바뀌었으리. 퇴근하자마자 곧장 또박또박 귀가하는 따님이 이제 얄밉기까지 하다시던 선배시인 말씀이 생각난다. 결혼이 그렇게나 좋은 건가요? 나이 찬 ‘애’들이 시집 장가를 안 가고 있어 고민하는 노모가 많은 시절이다.

황인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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