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고/김경원]‘깊고 긴’ 글로벌 불황이 온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7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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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그래픽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 유로존 위기는 과연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충격”(지난달 8일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될 것인가. 하반기 세계경제는 어떻게 될 것이며 한국경제의 앞날은 어떤가. 경제·경영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세계 경기 불황의 원인과 미래,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 등을 진단하는 글을 보내 왔다. 그는 “중국 인도라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한국경제는 비교적 세계 경기 불황의 영향을 덜 받겠지만 ‘가계부채’를 잡지 않으면 미래가 어둡다”고 지적했다.<편집자> 》
김경원 경영학 박사
김경원 경영학 박사
위기를 뜻하는 영어 단어인 ‘리스크(risk)’는 암초나 벼랑을 뜻하는 그리스 말인 ‘리자’에서 왔다고 한다. 즉 미리 대비하여 피하거나, 그 위에 서서는 안 되는 대상이라는 뜻이다.

최근 세계경제라는 ‘배’는 2년여 전부터 발견된 유럽 재정위기라는 ‘암초’를 앞두고 위태위태한 항해를 지속하고 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보다 암초 크기가 훨씬 크고 개수도 더 많다. 그리스는 유로존(유로화를 사용하는 EU 국가들)에서 탈퇴할 수 있다는 소위 ‘그렉시트(Greece+Exit)’ 가능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며, 얼마 전에는 스페인도 EU에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이에 따라 지난 2008년에 글로벌 금융위기와 불황이라는 암초에 걸린 적이 있던 ‘세계경제호(世界經濟號)’가 다시 비슷한 암초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지는 모습이다. 아직은 가능성에 그치고 있으나 불과 몇 년 만에 금융위기가 정말로 다시 일어난다면, 금융위기가 잦다는 양상만으로도 요즈음 경제상황을 ‘이례적’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그런데 좀 더 길게 뒤를 돌아보면 ‘이례적’인 경제상황은 이미 15∼20년 전부터 전 세계가 겪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여러 번의 자산 버블이 형성되었다가 소멸하면서 금융위기와 불황으로 연결되었다.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등 주식 버블에 이어 2000년대 들어서는 주택 버블, 2000년대 후반부터는 유가 등 원자재 버블이 뒤를 이었다(필자가 아는 한 인류 역사상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런 큰 버블’이 ‘이렇게 자주’ 발생한 적은 없었다). 또한 이러한 버블의 생성과 소멸에 경기가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경기 변동의 주기는 짧아지고 폭은 커지는 경기의 불안정성도 커졌으며 버블 소멸기에는 반드시 금융위기와 불황이 뒤따랐다.

도대체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원인들 중 가장 크고 가장 기본적인 힘은 뭐니 뭐니 해도 ‘중국의 세계경제 편입’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초 중국이 개혁개방의 가속 페달을 밟자 전 세계 공장이 중국으로 몰려가면서 이후 단시일 내에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했다. 중국이 이처럼 급부상한 이유는 인류 역사상 ‘교육 받은 양질의 노동력’이 이만큼 값싸고 대량으로 공급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은 때마침 불어 닥친 ‘디지털 혁명’과 맞물리며 전 세계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오랫동안 저물가 속에 고성장을 달성할 수 있는 소위 ‘신경제 현상’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은 중국 덕이 크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경제현상 이면에는 앞에 언급한 ‘잦은 불황’이라는 ‘이례적인’ 현상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예전에는 돈을 풀면 물가가 오르는 것이 당연했으나, 저물가가 지속되니 돈을 풀어도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을 확인한 각국 중앙은행이 본격적으로 돈 풀기에 나섰다(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어서 1990년대 외환위기를 겪은 이후 통화가 급격히 팽창하는 모습을 보였다. 소위 ‘IMF 극복’ 수단으로 통화팽창을 선택한 결과이다). 이는 주식, 부동산 등의 버블로 연결되었다. 버블이 생성될 때에는 경기호황을 더욱 부추기고 꺼질 때에는 급격한 불황을 초래했다.

게다가 각국의 정책 당국이 돈을 풀어 생긴 문제(자산 버블의 생성과 파열)를 다시 돈을 풀어 해결하려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불황이 닥치면 중국의 물가안정 역할에 기대어 마음껏 돈을 풀 수 있었고 이 돈은 다시 새로운 버블로 연결되며 경기를 부양시키는 ‘매직(magic)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자산 버블이 생기고 꺼짐이 반복되면서 경기 순환 사이클도 갈수록 짧아지고 금융위기도 빈발하게 된 것이다. 마치 술을 먹어 생긴 숙취 문제를 다시 술을 먹어 풀려는 소위 ’해장술‘ 사이클이 생긴 것이다.

이런 국내외 경제 상황은 향후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까?

특히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향후 경기의 향방일 것이다. 문제는 현재의 유럽 재정위기가 더 악화되어 새로운 글로벌 금융위기로 번질 경우 각국이 쓸 수 있는 정책 수단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는 중국조차 인플레이션으로 고전하는 등 더는 중국의 세계 물가 안정 역할을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주요국의 ‘나라 곳간’은 급속한 복지지출 확대 추세 속에서 지난번 금융위기 때 경기부양용으로 총동원돼 거의 거덜 난 상태이다. 또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고령화 추세는 향후에도 재정 건전성을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은 다음에 올 글로벌 불황이 ‘깊고 긴’ 것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 언제 닥칠지 그 시점을 정확히 예상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시작은 유럽 재정위기 국가 중 하나라도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할 때 올 것이다. 이르면 올 하반기에 닥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연초 EU 회원국들 간에 ‘신 재정협약’이 합의되고 최근 EU 정상회의에서는 성장촉진 정책과 단일은행감독기구 설치 등이 합의되는 등 각국이 재정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좀 더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의 재정건전성 강화 대책은 그렇지 않아도 떨어져 있는 성장 잠재력을 더 떨어뜨려 빚을 더 못 갚게 만드는 딜레마가 있다. 이를테면 ‘노동밖에는 팔 것이 없는 육체노동자의 식비를 줄이는 일’과 같다. 성장촉진 정책도 그 내용이 구체화되고 시행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궁극적으로 유로존의 부분 붕괴가 불가피하며 이제 남은 문제는 ‘언제가 될 것인가’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로존 은행들의 자본 확충 독려 등 지난 몇 년 간 유로존 핵심 국가들이 해 온 노력들도 이들 재정위기 국가의 궁극적인 지급불능 선언에 대비해 자국 금융시스템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비할 시간을 벌고 있을 뿐이라는 지적이다. 나는 앞으로 다가올 불황이 깊고 길다는 점에서 ‘심장(深長) 불황’이라 부르고 싶다.

어떻든 이처럼 대외 여건이 위태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한국경제호(韓國經濟號)’도 자신만의 암초를 앞두고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은 ‘솟아날 구멍’이 있다. 바로 중국과 인도 때문이다.

세계적 불황 극복의 동력은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인도가 제공할 것이다. 이들 국가는 그간의 경제발전에 따라 중산층이 크게 두꺼워져 내수시장이 급성장할 시점에 다다른 데다, 체제 안정이 최우선 목표인 중국은 다시 본격적인 경기 부양에 나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리적으로나 상품 구성으로나 한국이 가장 큰 수혜국이 될 것이다. 실제로 지난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중국 정부는 4조 위안을 투입하여 내수를 끌어올린 적이 있었다. 급격한 경기 후퇴로 도시에서 직장을 잃은 농민공(農民工)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심각한 사회 불안을 일으킬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중국의 농민공은 약 2억20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한다). 게다가 중국은 은행시스템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고 재정 상황도 튼튼하여 경기 부양의 여력도 충분하다. 따라서 한국은 향후 심장 불황을 이겨 내기 위해서 세계 경제 회복의 동력을 제공할 ‘친디아(China+India)’ 시장을 겨냥해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상대적 우위에 있는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가지고 이들 국가의 서비스 시장에 본격 진출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회도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암초이자 시한폭탄으로 거론되는 가계부채 문제를 연착륙시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한국은 그동안 세계적인 추세에 맞추어(?) 방만한 통화정책을 추진해 온 결과 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가계부채 문제는 글로벌 불황이 닥쳐 뇌관 역할을 할 경우 경제의 바닥을 훨씬 깊게 만들 수 있는 폭발력이 있다.

한국은행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부채는 3월 말 기준 911조 원이 넘는다. 여기에 자영업자 대출 등을 포함하면 사실상 1000조 원을 넘은 것으로 추정된다. 대한상의가 최근 2011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계산한 결과 81%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73%를 크게 웃도는 것으로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스페인(85%)에 육박하는 수준이다. 2011년 3분기 기준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을 따져보면 우리나라는 154.9로 스페인 140.5보다도 높았다.

규모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가계부채의 증가 속도다. 2002년 439조1000억 원이던 가계부채는 2011년 912조9000억 원으로 10년간 두 배 이상 불었다. 가계부채라는 뇌관이 터져 버리면 경기악화→가계소득 및 자산가치 감소→ 원리금상환부담 증가→ 개인파산 증가→ 금융권 부실→한국경제 충격으로 이어지는 경제대란 시나리오가 현실화할 수 있어 모든 정책의 에너지는 이쪽으로 집중될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중국’ ‘인도’라는 기회가 있다 해도 잡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거래세 보유세 등의 대폭적인 규제완화도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인 대책은 무섭게 떨어지고 있는 집값의 급격한 하락 추세를 막는 것이다. 현재 가계 부채의 60% 이상이 집 구입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집값 연착륙을 시키지 못하면 내년도 한국경제호도 큰 암초에 걸릴 위험성이 커 보인다.

김경원 경영학 박사
#유로존#글로벌 불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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