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훈]장젠, 하늘이 내린 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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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5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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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중국 장쑤 성 하이먼 시는 외자 유치에 여념이 없다. 상하이와 인접한 하이먼은 양쯔 강 삼각주 지역의 교통 허브다. 6조 원을 쏟아 붓는 시 북부 둥자오 신항 프로젝트를 비롯한 각종 개발 청사진이 즐비하다. 최근 이곳을 아시아 7개국 신문기자들과 방문했다. 런민일보가 초청한 ‘아시안 미디어 투어’의 후반 일정이었다.

18일 오후 근 2주에 걸친 대장정의 마지막 코스인 장젠 기념관으로 갔다. 시가 전날 제공한 영문 자료에는 하이먼을 ‘장젠(張건·1853∼1926)의 고향’으로 소개했다. 청 말의 위대한 학자이자 교육가, 기업가라는 칭송도 눈에 띄었다. 과연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런 표현까지 썼을까 은근히 궁금하던 차였다.

젊은 시절 그는 유학 공부에 정진하며 과거시험에 응시해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 41세 되던 해에 마침내 장원급제를 했다. 청나라가 중일전쟁에서 패한 1894년 무렵이었다. 이후 노쇠한 청의 국운은 급속히 기울고 열강의 침탈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청 황실을 타도하려는 혁명의 기운도 짙게 감돌았다. 조국이 처한 참담한 현실에 마음 아파하던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벗는다.

귀향한 그는 1896년 하이먼에 최초의 근대 방직공장을 세워 기업가로서 첫걸음을 내딛는다. 이후 그는 98개 기업을 일으키고 지역에 370개 학교를 세웠다. 난퉁대도 그가 세운 학교가 전신이다. 바쁜 와중에도 자신이 세운 학교에서 직접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훈장이 책 짐을 싸들고 하이먼으로 건너오자 기개 있는 그를 학교의 선생으로 초빙했다는 일화에도 눈길이 갔다.

1903년 일본 총영사의 초청으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해 5월 오사카에서 열린 박람회에 8차례나 찾아가 많은 것을 배우고 시야를 넓혔다. 귀국한 그는 청 황실과 내각에 박람회의 중요성을 거듭 일깨웠다. 그런 노력으로 청나라는 이탈리아 밀라노 박람회(1906년)에 사상 최초로 참가했다. 1910년에는 그의 주도로 국제박람회까지 개최했다. 2년 전 상하이 엑스포를 개최하기 100년 전이다.

이런 공적을 인정받아 그는 신해혁명 당시 쑨원 임시정부의 내각 10부 중 하나인 산업부 총장(장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공산혁명 후 마오쩌둥은 1956년 하이먼을 방문해 “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의 기념관 앞에는 2005년 장쩌민이 친필로 바위에 새긴 ‘張건 記念館’이 우뚝하다.

불혹(不惑)의 나이에 관직에 올랐으나 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향리로 돌아온 그는 ‘교육은 아버지, 산업은 어머니’라고 강조했다. 산업보국과 향리발전을 위해 산업의 밭을 일구고, 교육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신념을 관철했다. 박애주의자인 그는 빈민구제에 아낌없이 사재를 털었지만 자신은 검약을 실천했다.

기념관 사당 현판에는 ‘天民先覺(천민선각)’ 네 글자가 적혀 있다. 하늘이 낸 백성 중의 선각자란 뜻이다. 무섭게 성장한 중국 굴기(山+屈 起)의 중심에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있다. 그 중심인 연안지역은 선생이 산업보국과 인재양성을 주창하고 실천한 영향을 받은 곳이다. 선각자 장젠 선생과 동아일보 창업자 인촌 김성수 선생의 삶의 궤적에는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인들은 그를 기리며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발휘해 내일을 향해 질주하는데, 우리는 거칠고 편협한 이념의 잣대로 피아를 가르고 과거의 역사를 재단하며 반목하고 있으니….’ 사당의 향에 불을 붙이며 묵념하는 동안 스친 씁쓸한 단상이다.

최영훈 편집국 부국장 tao4@donga.com
#중국#장젠#선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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