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프리즘/홍권희]“절대로 경제사업에 말려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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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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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권희 논설위원
홍권희 논설위원
영화가 시작되자 바둑판처럼 경지정리가 잘된 논에서 부녀자들이 트랙터로 논을 갈고 기계로 수확하는 장면이 나왔다. 기계로 캐낸 석탄은 컨베이어벨트로 운반됐고 김책제철소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은 철강재가 됐다. TV 냉장고 등 가전제품, 비날론과 직물은 물론이고 자동차, 트랙터와 거대한 선박, 전기기관차까지 척척 생산되고 있었다.

무모한 자력갱생으로 경제파탄


1972년 2월 박정희 대통령과 장관 등 주요 인사들이 북한 선전영화를 봤다. 북한이 재외공관에 돌린 3종의 필름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3시간짜리로 편집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자존심이 상한 박 대통령의 지시로 오원철 경제2수석비서관이 며칠 후 요인들에게 북한 경제의 실상을 보고했다. “자원이 많고 시장규모를 갖춘 소련 중국도 쉽지 않은 자력갱생 자립경제를 소규모 국가가 추구했다가는 국제경쟁력이 떨어져 파산하고 말 것”이라는 게 요지였다.

팔순을 넘긴 오 전 수석은 지금도 40년 전 영화 장면이 기억나는 듯 수치까지 열거해가며 당시 북한 산업의 약점을 짚어낸다. “한국보다는 많았지만 제한된 철광석, 석탄, 전력과 오래된 공장 등 자체 자원에만 의존한 개발전략으로는 경제 파탄을 피할 수 없어요. 당시 풍부한 석탄과 전력을 활용해 생산한 유안(硫安)비료는 질소가 주성분이어서 땅을 산화시키는 단점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복합비료를 만들었죠. 비료만 봐도 북한이 훗날 전력 부족과 객토작업으로 고생할 게 뻔했지요. 전력이 모자라면 석탄도 못 캐고 공장도 못 돌리죠. 중공업에 매달려 주민의 의식주를 소홀히 한 것도 전략의 큰 잘못이고요.”

북한 선전영화도 자동차공장장 출신으로 산업현장에 밝은 오 전 수석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지 못했다.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미국에서 남북한과 6·25전쟁 연구로 유명한 이정식 전 펜실베이니아대 교수(현 경희대 석좌교수)는 오 전 수석의 북한경제 분석을 보고 “남북한 경제의 차이를 비로소 정확히 알게 됐다”는 감사 편지를 보냈다.

양문수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은 중공업 우선정책으로 1960년대 고도성장 이후 침체했다가 다시 소폭의 성장에 이어 깊은 침체에 빠졌다”면서 “사회주의 경제개발의 보편적 양상”이라고 말했다. 그래프로는 큰 산과 작은 산 옆으로 계곡이 나오는 모양새다. 초반엔 선진국 따라잡기에 나서 주민의 희생을 토대로 자원을 모두 긁어모아 성장을 이루었지만 생산성을 높이는 단계로 나아가지 못해 주저앉은 것이다.

북의 세습정권은 주민에게 약속한 ‘강성(强盛)대국’은커녕 문도 열지 못했다. 2년 전 김정일이 경제난으로 14년간 가동을 멈췄던 2·8비날론공장을 다시 돌리며 기뻐 눈물을 흘렸다는 보도가 북의 현실을 말해준다. 김일성 탄생 100돌을 앞두고 김정은을 띄우기 위해 어제 내놓은 3000자가 넘는 노동신문 사설에서 ‘강성’ 소리는 일곱 번뿐이었다. 주민들 사이에 “위성을 쏘고 ‘위성강국이 강성대국’이라고 억지를 부릴 모양”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한다.

北 개방화-시장화 멈추기 어려워


김정은은 경제 현지지도를 최영림 내각 총리에게 맡긴다. 경제난 책임 회피의 의도라는 풀이다. 김정일이 ‘절대로 경제사업에 말려들지 말라’는 김일성의 가르침을 아들 정은에게 그대로 물려준 모양이다.

북한도 개방과 시장화(化)를 거부하지는 않았다. 현 체제를 침식하지 않고 정권 기반을 강화해주는 한도 내의 개방이겠지만 멈추기는 어려워졌다. 옛 선전영화가 북 경제의 몰락 가능성을 예고했듯 최근 방북한 외국 취재진이 보낸 조악한 평양의 공장과 황량한 농촌 사진들은 북도 살기 위해 개방과 체제 전환으로 갈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홍권희 논설위원 konihong@donga.com
#경제프리즘#홍권희#북한경제#북한개방#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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