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선 민주통합당 의원이 지난달 30일 기자회견 때 ‘이명박 정부의 2619건 무더기 사찰’을 폭로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불법사찰 관련 문건에선 ‘07.9.21’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노무현 정부 때 작성된 문건임을 말해준다. 이것이 단서가 돼 2619건 가운데 80% 이상인 2200여 건이 노 정부 시절의 문건인 것으로 밝혀졌다. 기자 출신인 박 의원이 사실 관계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면 자질 미달이고, 확인하고도 2619건이 모두 현 정부에서 사찰한 것이라고 주장했다면 조작이다.
공개된 문건 중에는 전·현직 경찰 모임인 무궁화클럽을 사찰한 것도 들어 있다. 이관희 경찰대 교수가 모 언론에 노 대통령의 전효숙 헌법재판소장 지명을 비판하는 칼럼을 쓴 것과 관련해 이 교수를 사찰한 문건도 있다. 둘 다 노 정부 때 작성된 것이다. 문화일보는 어제 김대중(DJ)·노무현 정부 시절 국무총리실 조사심의관실에서 작성한 보고서에 합법적 감찰 대상이 아닌 정치인 및 민간인에 대한 사찰 기록과 함께 은행통장 사본이 첨부돼 있어 불법 계좌추적 의혹도 있다고 보도했다. 계좌 추적이 조사 대상자의 자발적 협조에 따른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조사심의관실에 계좌추적권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불법적 수단이 동원됐을 가능성도 있다.
청와대는 노 정부 시절 총리실의 정치인 및 민간인 사찰 사례와 청와대 지시사항을 정리한 경찰의 ‘BH(청와대를 뜻함) 이첩사건 목록’을 공개했다. 노 정부 때 국가정보원 5급 직원이 이 대통령(당시 서울시장)의 주변 인물 131명을 불법사찰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DJ 정부 때는 국정원이 대통령 친인척과 고위 공직자, 여야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등 각계 주요 인사 1800여 명의 휴대전화 번호를 감청장비에 입력해놓고 광범위한 도청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일로 임동원 신건 두 전직 국정원장이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의 불법사찰은 비판을 받아 마땅하고 엄중한 수사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법률 위반이 있다면 합당한 처벌이 따라야 한다. 과거 정부에서 불법사찰이 있었다고 이 정부의 불법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그러나 DJ·노무현 정부의 후예인 민주당이 선거 정국을 맞아 이 정부의 불법사찰과 관련해 요란한 정치 공세를 펴는 것은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꼴이다. 민주당은 불법사찰에 관한 한 큰소리칠 자격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