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지인, 돌보미에 사냥되는 치매머니
인지 저하 전 자산 관리계획 세워야 보호
임의후견과 지속적 대리권 활성화하고
민간신탁 문턱 낮춰 후견 제도 보완해야
홍석철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최근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이 기획 보도한 ‘치매머니 사냥’의 실태는 매우 충격적이다. 치매 고령자의 자산을 일컫는 치매머니의 착취 피해 대부분이 가족, 요양시설 종사자, 지인 등 피해자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신뢰가 추락한 우리 사회의 단면과 치매 고령자 보호를 위한 국가 제도의 취약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도에서 다뤘던 치매머니 약탈은 재산 피해는 물론이고 치매 고령자의 삶의 질 저하, 가족 간 불신, 그리고 복지 지출 증가와 같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평안한 노후를 꿈꾸는 노인들에게 불안한 미래가 아닐 수 없다.
치매 발병 이후에는 법적 판단 능력이 저하되므로 치매 환자의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성년후견’이라는 까다로운 법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성년후견은 필요한 법적 보호장치이지만, 자산 활용 과정에서 치매 환자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자기결정권하에서 자산을 보호하려면 인지기능의 저하가 시작되기 전에 치매머니 관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한 제도가 ‘임의후견’이다. 임의후견은 후견인과 후견 권한 범위 등을 정해 공증 계약을 체결한 뒤 법원에 등기하고, 치매 진단을 받으면 법원의 후견 개시와 후견인의 업무 감독이 시행되는 제도다.
하지만 임의후견은 그 유용성에도 불구하고 2023년 신청 건수가 42건에 불과하다. 임의후견은 법원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는 보호 기능에선 강하지만 일반 국민에게는 접근성을 낮추는 구조다. 이에 반해 독일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법적 문턱을 낮춰 행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중심으로 임의후견을 시행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지속적 대리권’ 제도다.
일반적인 대리권이 일시적으로 법률·행정 행위를 대신할 권한을 부여하는 제도라면, 지속적 대리권은 의사능력이 있을 때 특정인에게 치매머니 관리 등에 대한 대리권을 부여하고, 치매로 의사능력을 상실한 이후에도 그 대리권이 유효하도록 하는 제도다. 독일은 공증을 필수 요건으로 두기보다는 지자체에 대리인을 등록하는 방식으로 임의후견을 활성화해 왔다. 그 결과 매년 30만 건 이상의 지속적 대리권 등록이 이뤄지고 있다.
그렇지만 독일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사회적 신뢰가 높지 않은 상황에서 지속적 대리권을 허용할 경우 치매머니 사냥꾼이 난무하는 부작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지속적 대리권 활성화를 목표로 하되 보다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 신뢰할 수 있는 후견인 공급이 뒷받침돼야 한다. 우리나라는 가족 후견 비중이 85%에 달한다. 공공후견인 제도가 있으나 그 규모는 200명 남짓에 불과하다. 이는 가족 외에 신뢰할 수 있는 전문 후견인 인프라가 매우 제한적임을 의미한다. 일본도 후견제도 도입 초기에는 가족 후견 비중이 90%였으나 현재는 변호사, 법무사, 사회복지사, 시민후견인 등이 82%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역시 유인 체계 개선과 양성 프로그램 확대를 통해 후견인을 다변화해야 한다.
둘째, 임의후견 또는 지속적 대리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 개선이 필요하다. 치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고 사전 예방이 치매머니 관리의 최선이라는 점을 알려야 한다. 치매선별검사 시 임의후견의 필요성을 홍보하고, 사전후견의향서 작성과 같은 캠페인 추진도 고려해 볼 만하다.
그러나 후견제도는 치매 고령자의 자산 관리 측면에서 제약이 따른다. 예를 들어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자산을 처분하려면 법원의 승인이 필요하다. 이는 피후견인 보호를 위한 법적 장치이지만, 치매 환자의 의료와 요양을 위한 적절한 자산 활용을 가로막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탁은 후견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신탁은 인지능력이 있을 때 설정되므로 자기결정권을 보호하는 장점을 갖는다.
하지만 치매머니 관리에서 민간 신탁의 기능은 턱없이 취약하다. 금융사가 치매 신탁 상품을 제공하다 보니 치매 신탁이 복지적 성격보다는 금융투자로 간주돼 신탁재산 범위, 관리형 신탁 인정 범위, 재신탁 허용 등에 있어 ‘자본시장법’의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간 신탁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개별 사안에 대한 규제 완화보다는 근본적으로 ‘신탁법’의 틀 안에서 치매 신탁을 다시 규정하는 혁신이 요구된다.
치매머니 실태가 보도되면서 정부도 부랴부랴 개선 방안을 내놓고 있다. 주목받고 있는 공공신탁은 보완적 수단으로서 의미가 있으나, 해외에서 치매머니 관리의 주된 제도로 활용되는 사례는 드물다. 임의후견, 더 나아가 지속적 대리권을 활성화하고 민간 신탁을 가로막는 규제 혁신이 더욱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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