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홍석민]책 없는 서재의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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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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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 산업부 차장
홍석민 산업부 차장
이런 상상을 해보자. 집에 책을 읽기 위한 독립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문에는 ‘서재’라고 써 붙이자. 그런데 그곳에는 책이 단 한 권도 안 꽂혀 있다. 커다란 나무책상과 의자뿐. 책상에는 책보다 가볍고 손에 쥐기 좋은 전자책 리더기가 달랑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엔 당신이 읽고 싶은 책이 수천 권 저장돼 있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책 없는 서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1995년 칼럼에서 그는 책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참조할 책’, 예컨대 백과사전은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다루기 어려우며, 비싸기 때문에 멀티미디어 디스켓으로 바꿔놓을 수 있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에서 최신 추리소설까지 ‘읽어야 할 책’들은 전자장치로 대체할 수 없다고 적었다.

종이책에 대한 이런 믿음은 2000년대 중반까지도 굳건했다. 에코는 종이책이 손으로 잡을 수 있고, 밑줄을 그을 수 있고, 페이지 모퉁이를 접거나 책갈피를 끼워 둘 수 있고, 졸릴 때에는 가슴이나 무릎 위에 놔둘 수 있고, 우리가 독서하는 규칙적인 습관과 집중도에 따라 마모되면서 개인적인 모습을 띠고, 만약 너무 깨끗하고 새것처럼 보일 때에는 우리가 아직 읽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는 등의 장점이 있다고 했다. 이런 표현은 이후 종이책 옹호론자들의 글에서 되풀이해 인용됐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뚜렷한 변화가 감지된다. 에코의 분류에 따르면 ‘참조할 책’이기는 하지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244년 만에 더는 종이사전을 내지 않겠다고 최근 선언했다. ‘읽어야 할 책’ 분야에서도 판도가 바뀌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세계 최대의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선 지난해부터 종이책보다 킨들용 전자책이 더 많이 팔린다. 2007년 처음 전자책을 팔기 시작한 지 4년 만이다.

이달 5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기사에 대한 댓글 논쟁이 상징적이다. 기사의 요지는 태블릿PC가 독서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유튜브 동영상을 볼 수 있다거나 e메일이 왔다는 팝업창이 뜨는 식으로 딴짓을 하라는 유혹이 많기 때문이다. 18일까지 달린 236개의 댓글 가운데 전자책 대 종이책 구도가 아니라 같은 전자책끼리 비교하는 댓글이 많다는 점이 특히 눈에 띈다. “내가 이달에 읽은 것 가운데 최악의 기사다. 킨들에서 광고비를 받은 건 아닌가” 하는 식이다. 전자책이 그만큼 일상화됐다는 의미다.

물론 모든 분야에서 전자책이 우세한 건 아니다. 전자책 가운데 많이 팔리는 건 무협, 로맨스, 추리 등 이른바 장르소설이다. 교보문고에선 지난해 장르소설이 전체 전자책 판매의 절반을 넘어섰고 최근 베스트셀러 순위에선 로맨스소설이 대거 상위권에 포진했다. 무거운 주제를 다룬 책은 여전히 종이책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최근 10여 년 만에 이사를 하면서 잠시 ‘책 없는 서재’를 상상해 봤다. 사놓고 한 번도 안 읽었거나 몇 년째 책장에서 먼지만 쌓인 책은 모조리 필요한 사람에게 줘 버리자. 이달 들어 구입해서 읽은 6권의 책이 모두 전자책 아니었나. 하지만 막상 책을 떠나보낼 생각을 하니 왠지 애처로운 마음이 들어 생각을 접었다.

에코가 언급했던 종이책의 물리적인 특성과 기능은 최근 나온 전자책 단말기에선 이미 거의 다 구현됐다. 이젠 종이책의 존재 이유로 종이냄새나 먼지를 터는 경험 같은 아날로그적 감성과 집중하기 좋다는 식의 장점을 내세워야 하는 시대다.

홍석민 산업부 차장 sm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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